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시기에 부모의 자존감이 어떻게 아이에게 대물림되는지에 대해 배우던 한 수업에서 ‘마더쇼크’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울면서 안아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엄마, 아이가 자신을 닮을까봐 걱정하는 엄마, 그 엄마들 속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나는 요즘으로 치면 조금 이른 시기인 20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는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만큼 결혼, 임신, 출산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엄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내가 아이를 낳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혼란’이었다. 내 몸속에서 생명이 태어난 일은 너무도 신기했지만, 출산 후 훗배앓이로 밤새 한숨도 못자고 온몸이 퉁퉁 부은 나에게 젖을 물리라며 아기를 데려왔을 때 나는 내 아이가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퇴원 후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온 첫날 내 몸도 다 추스러지지 않았는데 밤 새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랠지 몰라 안았다가 업었다가 젖을 물렸다가 하다가 결국 아이와 함께 엉엉 울어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모두를 원망했다. 산후조리원에 들어갈 필요 없다며 예약해 둔 조리원을 취소하게 만든 시어머니가 미웠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옆에서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자는 남편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일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은 혹은 미디어는 엄마가 되면 방긋방긋 예쁘게 웃는 아기를 안고 무한한 행복을 누리는 엄마의 모습을 기대하게 했지만 현실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다들 쉬쉬하는 거라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든지 알게 되면 아무도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에 부쳐두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한동안 남모를 고민에 빠졌었다. 나는 왜 내 아이가 이렇게 힘들까? 난 왜 아이가 이쁘기보다 부담스럽게 여겨질까? 나는 모성애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본능이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모성 행동에는 아이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이유식을 하고, 신생아를 목욕시키고, 밤과 낮이 바뀐 아이를 잘 재우고, 아이에게 맞는 놀이학교를 고르고, 조기교육을 시키고, 아이의 용품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엄마들은 아이를 노련하게 돌보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모성을 의심한다. 만약 모성에 엄마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포함된다면 모성은 당연히 불완전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모성을 100이라고 볼 때,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뇌 구조나 호르몬 변화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부여되는 본능은 50정도나 될까? 그 나머지인 각종 양육이나 살림 기술 등은 당연히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육아에 서툰 엄마라도 아기가 위험에 처하면 물불 가리기 않고 몸을 던진다. 이런 과감한 행동을 결정하고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1~2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본능적인 모성으로 목숨 걸고 아기를 구해와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서투르고 힘들다. 엄마가 하는 일은 원초적인 모성 본능만으로는 노련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엄마가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회사에 가도 수습기간 3개월이 주어진다. 3개월 동안은 배우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은 실수도 배우는 과정이라고 이해해 준다. 그런데 엄마가 되는 것은 수습기간이 없다. 바로 실전에 돌입해야 한다. 마치 방금 운전면허를 땄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아이와 나는 처음 만난 사이였다.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아이를 알아가기 위한 시간 역시 필요했다. 그런 내가 바로 베테랑 엄마처럼 아이를 케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그때의 나를 회상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엄마들이 그때의 나처럼 자신의 모성을 의심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너무 부끄럽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누구에게도 꺼내진 못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큰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도 문득문득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를 때면 아 내가 엄마가 되었지, 내가 이 아이를 낳았지 하고 퍼뜩 정신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내가 엄마라는 존재가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초보 엄마가 ‘엄마자리’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 당연히 지금은 내가 엄마라는 것이 너무도 익숙하고, 아이들이 ‘엄마’하고 부르면 자동으로 ‘응’하고 대답하는 10년 경력의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지금이라도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책이 있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처음이라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이었지만 걱정하고 힘들어 했던 내 마음 더 깊은 곳에는 혹시 어린시절 나의 상처가 나의 모성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아이가 울거나 떼를 쓸 때 더욱 심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떼를 쓰면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아이가 겹쳐서 보였는데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나의 미해결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우는 상황일 때 엄마들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화가 날 수도 있고 미안할 수도 있다... 감정 뒤의 또 다른 자기감정을 심리학에서는 초감정 이라고 한다. 자기 안에 있는 ‘무엇’은 엄마 안에 남아 있는 미해결 과제로 본다. 미해결 과제란 어릴 때 경험 중 완결되지 못했거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다. 어린 시절의 미해결 과제는 초감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울 때 단순히 아이의 감정으로 보지 않고 엄마 자신의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민하씨는 어린시절 하루도 울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민하씨가 운 것은 무서운 엄마 때문이었는데 엄마는 더 무서운 모습으로 그런 민하씨를 혼냈다. 최성애 박사는 민하씨가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에도 화가 끝까지 치밀게 되는 것은 실은 민하씨 안에 있는 초감정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이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엄마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울고 떼를 쓸 때 엄마인 내가 예민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은 아이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다. 아버지에게 혼나고 울던 어린시절의 나는 더 크게 혼나는 것이 무서워 소리내서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곤 했었는데 그 때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내게 남아 있다가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그 때의 나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거듭될수록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우는 모습에서 나를 보았고, 아이를 달래는데 써야 할 에너지는 나의 감정을 추스르는데 쓰기도 부족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상담심리를 공부해보기로 했고 둘째가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해에 공부를 시작했다. 어찌보면 공부는 나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상담공부를 하면서 내안의 ‘나’를 만나고 또 만났다. 상처 입은 나를 만나고, 부모님을 원망하는 나를 만나고, 엄마자리를 버거워하는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두 챕터로 나누어진 동화책과 같다. 첫 번째 챕터에는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이 있다. 이 챕터의 저자는 친정엄마일 가능성이 크다. 내용은 바꿀 수 없고 보완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고 형편없는 아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했다. 이유를 아무리 물어도 말해주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살기위해 이유 따위는 묻지 않았다. 두 번째 챕터부터는 다르다. 이제부터 저자는 나 자신이다. 더 이상 때리는 사람도 없고 형편없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다. 내 생각이나 감정을 무시하는 사람도 없다. 누구도 더 이상 친정엄마의 ‘뜻’대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첫 번째 챕터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지, 새롭게 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물론 시작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내용을 또다시 슬픔과 아픔으로 채울지, 어린 시절 그렇게 갖고 싶었던 웃음, 행복, 사랑을 채울지는 지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현실치료를 창시한 심리학자 윌리엄글래서는 개인의 모든 행동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책에서 나온 것과 같이 우리 삶의 첫 번째 챕터에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고 부모의 양육방식을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챕터에 들어서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부모를 원망하며 살 수도 있지만, 과거의 상처를 계기로 나를 돌아보고 내가 원하던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내가 늘 마음에 새기는 문장이 있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좋은 부모가 될 수는 있다.’ 엄마의 선택은 엄마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아픈 상처는 나 하나로 족하다. 부디 내 아이에게는 이 아픔을 대물림 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