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는 당혹과 좌절이 뒤섞인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한 줄이야?”
그녀는 임신 테스트기를 쥔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나는 다가가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때는 몰랐다. 우리의 여정이 4년이나 이어질 줄은.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던 중 자궁근종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학교 동기에게 로봇 자궁근종절제술을 받았다. 큰 수술이었고, 쉽지 않은 회복의 시간이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그 이후가 더 뼈아프다는 걸 미리 알려줬다면, 우리는 더 버틸 수 있었을까.
휴가를 최대한 붙여 한국에서 두 번째 시술을 받았다. 결과는 두 줄이었다. 피검사 수치도 좋았다.
우리는 잠시나마 아이를 안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피검사에서 hCG가 충분히 오르지 않았다. 화학적 임신이었다.
억울했다. 우리 아이를 도둑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또 다른 한국행을 계획했다.
세 번째 시술도 두 줄이었다. 하지만 한 번 도둑맞아본 우리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 돌아와 확인한 hCG는 또다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식 후 긴 비행이 문제였을까. 왜 착상은 되는데 유지되지 않을까.‘
침울한 나날이었다. 일을 다녀온 뒤에도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빠, 나… 미국에서 받을래.”
한국 시술은 미국의 악명 높은 진료비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미국에서 받겠다는 말에, 통장 잔액이 눈앞을 스쳤다. 나는 HSA 계좌와 401k를 오가며 복잡한 계산에 몰입했다.
“그래, 여러 가지로 알아보자. 한국에서 받는 건 무리였어.”
며칠 뒤,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병원에 난임 지원 보험 프로그램이 따로 있던데?”
나도 몰랐던 혜택이었다. 평소 병원에 고용된 삶에 감사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일은 늘 많았고, 대우가 업계 최고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 보험 하나로, 나는 이 병원에 영혼까지 갈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도 비보는 이어졌다.
화학적 임신이 반복됐다. 두 번의 두 줄, 두 번의 추락. 시간이 지날수록 더 조급해졌고, 주변의 임신 소식이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어느 날 밤, 와이프가 울먹이며 말했다.
“오빠, 나 이제 그만 할래. 희망고문 당하기 싫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의사였다.
이미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한 이후였다. 와이프의 나이, AMH 수치, 자궁 상태를 보면 임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시험관 시술은 다섯 번 이내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미 그 횟수를 넘어서 있었다.
“자궁 환경상 착상이 유지되기 어려워 보여. 배아 상태가 괜찮다면 대리모도 옵션이야. 비용은 10만 불 정도고.”
와이프는 내 품에서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이해할 만했다. 임신의 전 과정을 자기 몸으로 겪고 싶은 마음. 그 고통을 감수해서라도 아이와 이어지고 싶은 마음.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다만 어떤 선택이든,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며칠만 더 생각해봐.”
며칠이 지났다.
와이프가 쭈볏거리며 말을 꺼냈다.
“오빠, 내가 생각해봤는데… Dr. F가 제시한 방법으로 열심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일 그만두고 한국 가서 될 때까지 해보고 싶어.”
속에서 울컥 올라왔다. 그녀가 버텨온 시간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 오빠 믿지? 인형 눈알 붙이기 알바를 해서라도 지원해줄게.”
또 다른 고난이 이어졌다.
와이프는 일을 쉬며 운동을 시작했고, 몸을 다시 만들어 나갔다. 폐경을 유도하는 치료는 잔인했다. 매일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목에 건 작은 선풍기가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 다음은 주사 지옥이었다. 크녹산 피하지방 주사와 프로게스테론 근육 주사가 엉덩이를 멍자국으로 덮어갔다. 오일 주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맞은 자리는 단단히 뭉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주사를 놓아줄 때마다, 덜 아프기를 바랐다.
그 모든 고통의 터널을 지난 뒤, 첫 피검사 결과는 좋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뻐할 수 없었다. 두 번째 피검사까지 남은 48시간은, 억만 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두 번째 수치가 나왔다. 더블링을 넘었다.
그제서야, 정말 그제서야 우리는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가슴 설레던 첫 초음파.
내가 먼저 느낀 딸의 태동은, 말로 옮기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누군가 과거의 나에게 앞으로 닥칠 고난을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 혼자는 솔직히 버거운 고난이었다. 하지만 함께라면 언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