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심장.

by 참울타리


“두 개 할까, 세 개 할까.”


와이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아 한 개는 이미 선택지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이 셋이 그려졌다. 내 어깨 위로 목마를 탄 아이와, 왼쪽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보채는 아이, 바닥에서 구르며 간식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가 말이다.


“삼둥이는 티비에 나온 거 보니까 육아가 거의 전쟁급이던데?”


임신은 난임 부부의 간절한 소망이다. 단 일퍼센트라도 확률을 높일 수 있다면,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 개 넣어도, 하나나 두 개 되는 게 거의 대부분의 경우이던데?”


의사로서 와이프의 합병증 없는 안전한 임신은 중요했다. 하지만 시도 차수를 늘리지 않고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도 꿈틀거렸다.


‘세 개 넣으면 하나는 되겠지…‘


이미 나조차도 가능성의 노예였다.


일주일 뒤, 우리 부부의 행복한 상상은 임테기 한 줄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때는 몰랐다. 신이 계획한 우리의 여정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게 잡혀 있었다는 것을.


귀중한 배아들은 소모되어 갔고, 줄어든 숫자만큼 마음도 바짝 타들어갔다. 주위에 자신보다 어린 산모가 하나둘 생기고, 언제부턴가 와이프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다. 저녁을 먹다가 그릇을 내려놓고 잠시 멈추는 일이 많아졌다. 무슨 생각인지 묻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의사였지만, 그 멈춤 앞에서 처방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 미국에서 시험관 하면 안 될까?” 와이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은 미국에서 하는 게 와이프에게 더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계산기 속 큰 숫자 앞에서, 선택지는 한국뿐이었다.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타이트한 일정. 반복되는 긴 비행. 임신 성공을 생각하면, 미국이 더 맞았다.


“일 잠시 쉬면서, 미국에서 진행하자.”


401k 잔고를 한참 들여다봤다. 얼마나 헐어낼 수 있을까.


미국에서도 지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시험관 센터는 고령 산모에게 PGT 염색체 검사를 기본으로 시행했고, 단일 배아 이식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하나씩만 이식해서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나 또한 확률의 노예였다. 미국 시험관 센터 의사는 와이프의 반복된 화학적 유산에 선근증을 의심했고, 폐경 유도 치료와 항혈전제 치료, 그리고 sirolimus와 prednisone을 포함한 면역 억제 치료를 시작했다.


’너무 과한 거 아니야. Sirolimus!‘


내과 의사인 나도 가끔 사용하는 sirolimus는 장기 이식 후 쓰는 면역억제제로 익숙한 약이었다. 머릿속에 와이프에게 생길 수 있는 기회감염균이 대여섯 개는 금방 떠올랐다.


나는 난임 전문가는 아니니, 오프레이블 스터디지만 따르자.

마지막 선택지가 남았다. 한 개 혹은 두 개의 배아 이식. 미국에서는 하나의 배아 이식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에서는, 그 원칙의 예외를 우리가 선택해야 했다. 마음속에서는 의사로서의 나와, 남편으로서의 내가 끝내 합의하지 못한 채 맞서고 있었다.


“두 개 하자.”


다태 임신의 합병증은 산부인과 족보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엔 순조롭게 임테기 두 줄의 축복을 지나, 첫 초음파였다. 나는 hCG 수치가 오르는 속도를 보며, 쌍둥이 임신을 은근히 기대했다. 두 아이의 이름도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다. 초음파 화면 속에서 꼬물거렸던 아이는, 예쁜 딸 하나였다. 다온이와 잠시나마 함께였던 아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다온이와 만날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며칠 전, 와이프가 말띠맘 오픈카톡방 이야기를 꺼냈다. 한 쌍둥이 엄마가 임신 중기에 자궁경부가 열려서 병원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첫 초음파 사진이 떠올랐다 — 하나의 심장만 뛰던 그 화면이. 그리고 산부인과 족보가 조용히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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