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그림자와 사람의 온도
제가 일하는 병원은 한인, 인디언, 히스패닉 등
마이너 인종의 인구 비중이 높은 카운티에 있습니다.
지난달부터 돌보고 있는 코로나 환자들 중 대부분은 히스패닉 분들이었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아이패드 통역기를 들고,
스페인어·영어 이중 동의서에 사인을 받기까지 —
같은 수의 환자를 봐도 시간이 두 배로 걸립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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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패닉이라 위험하니까 검사해야지.”
같이 일하는 백인 NP 한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손자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병원에 오는 히스패닉 환자를 마치 위험 요소로 여겼습니다.
저는 그 말이 인종차별적으로 들려
지적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무증상 감염자일 수 있으니 모두 검사하겠다’
이렇게 말했다면 저도 동의했을 겁니다.
하지만 ‘히스패닉이라 위험하다’는 말은
너무 쉽게 선을 넘는 문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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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쉬는 날,
다인종 마켓에서 생선을 사러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쓰지 않은 히스패닉 가족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방금 그 NP와 다를 게 없구나.’
내가 불쾌했던 그 사람의 편견이
어쩌면 내 안에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던 겁니다.
살다 보면, 어디까지가 편견이고
어디부터가 본능적인 경계심인지
참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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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을 가르쳐준 사람, 이태석 신부님
문득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흑인 아이의 찢어진 두피를 꿰매며
“까매서 잘 안 보인다” 하시던 장면.
그 말은 무례한 농담이 아니라,
현실의 고단함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던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노안이 온 눈으로 어둠 속을 더듬어가며
그 아이를 다독이던 손끝 —
그게 진짜 인간다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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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
며칠 전, 항암 치료 중 패혈증에서 회복한 환자분이
“이런 fucking hospital의 죄수 같아요.”
라며 저에게 화를 냈습니다.
설명을 이어가던 제게
“당신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내 말을 못 알아듣잖아요.”
라는 말까지 던졌습니다.
순간, 마음속의 이성의 끈이 팽팽히 당겨졌습니다.
잠시 밖으로 나와 숨을 고르고 들어갔지만,
그분은 여전히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저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입원은 제 의학적 조언이지만,
그게 불편하시면 자의로 퇴원하셔도 됩니다.”
그날 밤, 간호사와 잠깐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어제 자신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며 웃었습니다.
“의사들은 우리가 겪는 일을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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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아도, 닮고 싶은 마음
다음 날 그 환자를 다시 찾았습니다.
퇴원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덧붙였습니다.
“어제 제 언어가 불편하셨다면,
이 간호사 선생님은 원어민이니
필요하면 대신 설명드릴 수 있을 겁니다.”
네, 저도 뒷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완벽할 순 없어도,
그분을 닮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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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의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돌아봅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건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선입견이라는 걸 오늘도 다시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