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뒤에야 보인 것들.

by 참울타리


어릴 적 나는 미국 유학을 가고 싶었다.

주변에 해외에서 살다 온 친구들의 원어민 같은 영어 발음이 부러웠고,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는 막연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마침 그때, 막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촌 누나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훗날 매형이 된 그는 당시 내 수학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내 뜻을 비추었다.


“형, 저 미국 유학 가고 싶어요.”


형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고 타박했다. 미국은 오히려 공부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며, 정 유학을 가고 싶다면 나중에 더 커서 가라고 말했다.


‘그래? 까짓것, 지금 공부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고 나중에 유학을 가자.’


막연한 생각이었고, 어찌 보면 중학생의 천진난만한 계획이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원하던 의대에 합격했다. 막상 대학에 와서는 대학 생활을 만끽하느라 유학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났다. 하긴, 의대생에게 유학이란 애초에 먼 나라 이야기였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로 의사들의 집단 휴진이 있었고 의대생 휴학이 거론되던 시기가 있었다. 의사 단체와 정부의 적당한 합의로 사태는 비교적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예과생이었던 나는 휴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국민 의료를 위해 나섰다던 의사 선배들이 결국 적당한 당근 앞에서 만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장면은 오래 남았다.


‘이곳은 내가 의사를 하고 싶은 곳이 아니구나…’


의대를 마친 뒤, 나는 미국에서 수련을 받기 위해 집안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인턴을 지원하지 않고 곧바로 공중보건의사로 지원했다. 한 번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나의 집념은, 그때만큼은 유난히도 선명했다. 3년간의 공중보건의사 생활 동안 나는 미국 의사고시를 준비해 합격했고, 미국 레지던시 매칭에 도전해 이곳에서 수련을 받고 자리를 잡았다. 간단한 이력이지만, 그 사이에는 인간적인 고민과 번뇌가 함께한 긴 시간이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큰 조직에서 자국 의대 출신 의사 하나의 이탈은 그다지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 흐름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느낀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C대학 이비인후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최근 사표를 내고 미국 가정의학과 수련을 시작했다. 교수에서 다시 미국 레지던트로 돌아가는 선택은 개인에게도 막대한 기회비용이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보아도 가벼운 손실은 아니다. 의대생과 전공의를 가르치고 연구에 매진했어야 할 인력 하나를 미국에 내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수 한 명을 다시 길러내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만한 시간과 사회적 자원이 필요해진다.


한편, 이와는 다른 선택을 한 가족도 있다. 내 사촌 동생은 한의사인 큰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 진학에 매진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의 장수생 생활을 보상하듯 큰아버지는 동생에게 캐나다 시민권을 마련해 주었고, 그는 한국 군대의 의무에서도 벗어났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들리는 말로는, 큰아버지에게서 건물을 물려받아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나와 사촌 동생을 바라보면 상황은 오히려 더 단순해진다. 사촌동생은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한 채 한국에서 생활하며 병역 의무를 지지 않았고, 나는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에서 수련과 취업을 거쳐 시민권을 취득해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적 취득과 실제 거주지, 그리고 병역 의무의 부담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개인의 노력이나 성향만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이동 가능성과 의무 부과가 일관되게 설계되지 않은 구조의 결과로 보인다.


반면 나는, 원하던 미국에 와 내과 전문의로 병원에서 수많은 쉬프트를 소화하며 나름의 ‘어메리칸 드림’을 하루하루 만들어 가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삶을 살면서도 가끔은 다른 선택지를 부러워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이라는 ‘건물주’의 삶이 더 행복한 미래였는지, 아니면 나처럼 ‘의사’로 살아가는 삶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나와 친구, 그리고 사촌 동생의 선택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단단하게 계층을 고착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개인의 이동이 어떤 방향으로만 허용되고 있는지는 비교적 선명해진다.


한국은 오랫동안 사람을 갈아서 성장해 온 사회다. 조부모 세대부터 이어진 근면과 성실은 사회를 떠받치는 미덕이었고, 치열한 경쟁을 통과하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믿음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 믿음 위에서 사람들은 군대를 갔고, 밤을 세워 일했으며, 아이를 갖는 기쁨조차 뒤로 미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기 아이에게조차 공정한 게임의 룰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더 이상 공정하지 않은 게임에 플레이어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기록적으로 낮은 출산율을 가진 사회가 되었다.


내가 도미를 계획하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가 이렇게 빠르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내가 겪었던 그 잔인한 경쟁을 내 자녀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고, 가능하다면 더 넓은 선택지와 더 큰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이민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의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둘 들려오는 친구들의 이민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어쩌면 다가오는 재난을 피해 같은 방향으로 달아나는 레밍 떼와 다를 바 없다는 느낌만이 점점 또렷해질 뿐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들 잘 살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고, 치열한 경쟁을 버텨낸 끝에 사회는 분명 더 잘살게 되었는데, 정작 젊은 세대는 점점 더 불행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 세대가 누렸던 부와 안정감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대 간의 오해와 불신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게임판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선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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