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추석 무렵이었다. 고요한 미국의 점심 시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모교 병원으로 실려 온 내 친한 의대 동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부모님도 아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비보였다.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는 담담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숨길 수 없는 급박함과 슬픔이 눅눅하게 배어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지구 반대편 미국에 있는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았을까. 물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즉시 한국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나를 대신해 누구보다 발 빠르게 뛰어줄 수 있는, 우리가 함께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내 의대 시절을 통째로 공유했던 친구가 떠났다. 망한 미팅 뒤에 쓰디쓴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기도 했고, 실연의 상처로 시험까지 포기하고 늦잠 자는 놈을 억지로 깨워 시험장으로 끌고 가던 난리법석의 한가운데에 늘 그가 있었다. 우리 인생의 시트콤 같았던 에피소드들마다 그 친구의 웃음소리가 문장 부호처럼 박혀 있었다.
급히 한국으로 날아가 화장터에서 친구의 시신을 운구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그의 마지막을 내 손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그 비현실적인 상황은 끝내 믿어지지 않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한 구멍 하나가 생겨버렸다.
여러 해가 지나갔다. 세상의 시계는 무심하게 흘러 사람들도 그를 점점 잊어갔다. 나 역시 매일을 예전과 같은 날카로운 상실감으로 살지는 않는다. 깊게 베인 상처 위에 흉터가 돋고 새살이 차오르듯, 내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갔다.
하지만 나는 잊는 법 대신 기억하는 법을 택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친구 부모님을 찾아뵙고,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들의 소식을 듣는다. 나보다 하루 빠른 친구의 생일이 되면, 친구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상투적이고 투박한 메시지를 부모님께 보낸다. 어버이날이면 그가 살아있었다면 준비했을 화사한 꽃바구니를 골라 한국으로 보낸다. 꽃을 고를 때면 '이 녀석이라면 어떤 꽃을 골랐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이 맺히곤 한다.
친구의 기일마다 건네는 인사를 두고, 혹자는 이미 잊고 살아가고 있을 부모님께 오히려 아픈 기억을 들추는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지점에서 매년 망설이고 고민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부모님은 아들의 친구가 여전히 그를 빛나는 청년으로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매번 깊은 고마움을 전해주셨다.
사실 이것은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보답을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잊어야만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고들 하지만, 나에게 이 모든 행위는 내 삶에서 정말 소중했던 한 관계를 지켜내려는 나만의 애도 방식이다. 모두가 잊어갈 때, 그 흉터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산 자들과 함께 잠깐 웃고 울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그를 추도하는 가장 진실한 태도라 믿는다.
나는 물 흐르듯 인연을 흘려보내는 데 서툰 사람이다. 나에게는 상대의 생사나 거리와 상관없이, 소중한 인연은 여전히 빛나는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오늘도 나는 어찌 보면 참 고집스럽고 외로운 길을 걷는다. 그것이 훗날 친구를 다시 마주했을 때 덜 미안해지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내 천성이 미련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 무심했던 내가, 친구를 잃고 나서야 생일을 앞두고 한 해를 무사히 살아낼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깊은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그 친구가 내 삶에 남기고 간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내 생일을 하루 앞둔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친구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본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기약하는, 이 모순적이고도 애틋한 그리움이 오늘도 나의 하루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