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으면, 나는 늘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곧이어 “교회는 다니세요?”라는 질문이 따라오면, 나는 “다니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때마다 상대는 잠시 멈칫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에게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고난을 겪고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믿는 일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요즘처럼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그 마음을 떠올리며, 그분의 털끝만큼이라도 닮아 보려 애쓰는 일에 가깝다.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는, 결국 교회라는 조직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를 가리지 않고 품었던 그리스도의 사랑과 달리, 요즘의 교회는 사람을 나누고, 때로는 잘못된 믿음을 오히려 강화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 준다.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국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교회’라는 집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결함과 모순이 섞여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앞에서도 온전히 서지 못하는 인간들 앞에서조차 지금의 교회는 종종 위선적으로 보인다. 기독교를 말하면서도 니 편, 내 편을 가르는 모습은, 예수의 희생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얼마 전, 예전에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분의 SNS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마흔 초반에 커리어 전환을 시도한 배우자가 학업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며 겪는 어려움,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는 자신들에 대한 위로를 담은 글이었다.
그들의 고단함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 버거움 자체는 이해한다. 다만 냉정하게 보자면, 그 선택은 결국 그 자신과 그 가정을 위한 결정이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일도 아니고, 이를 ‘신의 뜻’이라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고난은 선택의 결과일 수 있지만, 선택 자체가 곧 고난은 아니다. 인생 초반의 커리어 설계가 어긋났고, 그에 따른 방향 전환을 중년에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선택을 ‘신의 뜻’이라는 말로 덧칠하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사립학교 학비를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희생의 서사로 엮어낸 그 글 앞에서, 나는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고단함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을 신의 의지로 설명하는 태도 앞에서, 내 마음은 조금 멀어졌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가 놀다 다쳐 두피가 찢어진 아이들을 꿰매 주며, 피부가 까매서 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요즘처럼 말 한마디가 곧바로 정치적 의미를 띠는 시대라면 그 표현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단에서의 그의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인종차별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분명히 ‘타인’을 향해 있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선택을 ‘고난과 희생’의 서사로 덧칠하는 장면 앞에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그 고난이 향하는 방향은 늘 같지 않다.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누군가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을 ‘신의 뜻’을 따른 희생으로 해석한다.
중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안다. 그래서 그 도전 자체에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면서도 그 전 과정을 ‘신의 뜻’으로 덧씌우는 모습을 보다 보면, 내가 가까운 시일 내에 교회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만 남는다.
어릴 적 교회 수련회에서 활동하다가 넘어져 무릎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당시 교회학교 선생님은 피를 질질 흘리던 내 무릎을 소독해 주고, 밤새 기도해 주셨다. 자세한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헌신적인 태도는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내가 떠올리는 ‘기독교’란, 결국 그런 모습이었다. 진정한 기독교란 내가 아닌 남을 섬기는 삶일 것이다. 자꾸 신의 뜻을 오독하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알지만, 나는 그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니다. 위험에 처한 타인보다 내 가족의 안정을 먼저 계산하고, 낯선 이의 고통보다 내 삶의 균형을 더 신경 쓴다. 나는 결국 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신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그 말은 너무 자주, 내 선택을 더 고상하게 보이게 만드는 장식이 되어 왔다. 내가 감당해야 할 욕망과 두려움을 신의 계획이라 부르는 순간, 나는 조금 덜 부끄러워진다. 나는 그 편리함을 안다.
나는 여전히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산다. 그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다만 내 계산을 신의 이름으로 올려놓지는 않겠다. 그 대신, 내 이기심을 인정한 채로 아주 가끔, 누군가에게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을 해보려 한다. 그것이 나의 작은 신앙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