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은 온다

흐르는대로 둘 것

by truefree

물건을 놓치는 빈도가 매년 늘어난다. 마루 바닥에 패인 흔적들을 보며 '나는 어찌 이리 부주의한가' 생각하다가도... 해가 갈수록, 올 것이 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하려던게 아니라 잘 들고 있던 것들이 스스륵- 손을 빠져나갈때 특히.


지난 건강검진 때는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사람들에겐 탈모 검사를 말하며 웃었지만 실은 루게릭 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병위험 3.224배라고 쓰여져 있는걸 보며, 역시나 그렇구만, 하고 덤덤했다.


형은 근 디스트로피였다. 열한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스물셋이 되던 해 봄을 맞지 못했다. 집안 거실을 벗어나지 못하던 십이년의 감옥살이. 창으로 낮게 보이던 하늘과 그마저 가린 나뭇가지가 풍경의 전부였던 형은, 떠나기 얼마 전 눈 내린 날 밖을 보고 싶노라 하여 짧게나마 바깥 구경을 하고 갔다.


다행히 나는 건강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결혼해서 발병하면 네 인생은 어떡하느냐'고 탐탁치 않아하신다는 이별을 겪기 전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군 하고 뒤늦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십여년의 감금 생활을 준비해야 할 지 모른다고.


올 것이 온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냉정하게 보면 올 것이 오는 건 노환도 마찬가지다. 몸이 시나브로 말을 듣지 않고, 두 발로 설 수 없게 되고, 자리에 누운 채 밭은 숨을 내쉬다 종내 뛸 힘을 잃은 심장 근육이 멎는다. 동일한 프로세스다. 다행히 살만큼 살고 남들 하는건 어지간히 해보았으니 이제 근 디스트로피가 온다고 해도 노화가 좀 분주하게 진행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다가올 것들은 다가오게 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발병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내가 불사를 달성한 첫번째 인간으로 역사에 기록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달의 대기에 분포한 산소 분자보다 더 희박할 것이다. 걱정하고 찾아보고 검사하고 염려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멀쩡히 잘 살아왔는데, 나이들면 겁이 많아진다더니 나도 겁쟁이가 되어가나보다. 올 것이 오나... 하는 생각이 비온 뒤 잡초처럼 불쑥불쑥 돋는다.


겁쟁이가 된 자신이 썩 불편해져서 가고싶던 포르투갈 행 티켓을 끊었다. 살던대로 지금을 살아가야지. 내일 죽어도 아쉬워 않게 오늘을 행복하게 살자. 올 것이 오기 전에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듣겠다. 가자. 재밌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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