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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Oct 16. 2023

뭐 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의 맛있는 이야기

‘멜로가 체질’ 대본집 리뷰


얼마나 팬들의 요청이 많았으면 드라마가 끝난 지, 4년 만에 대본집이 출판된 것인지 궁금했다. 게다가 말맛이 어마어마하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대본집도 일종의 책이기에 술술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 드라마를 아예 보지 않은 경우라면 더더욱. 그래서 집어 든 책이었다.


   이 대본집은 처음부터 “나는 굿즈요!”를 외치고 있었다. 작가들의 말이나, 작가의 ‘pick’이 그 증거다. 각 권당 10페이지 정도로 작가들이 뽑은 명대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배우들의 사인이나 작가의 사인도 인쇄되어 있다. 무려 표지는 하드커버 되시겠다. 색감도 드라마 느낌을 잘 살린 멜로핑크와 멜로초록이다. 꽂아두기만 해도 책장이 화사해진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세 친구와 그들을 둘러싼 일, 연애, 친구, 가족, 죽음, 삶 등을 그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주인공인 진주가 입봉작*을 쓰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게 진주가 쓰는 드라마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인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대본인 ‘멜로가 체질’인지 헷갈릴 정도로 내용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대사 하나하나의 말맛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어떻게 이런 말을 쓸 수 있나 싶다. 작가의 pick이 왜 권마다 10페이지, 전체 20페이지를 넘는지 이해가 되었다. 다만, 볼수록 빠져드는 작품이라는 건데, 1권은 다소 헤매면서 읽곤 했다. 일단 다음을 읽어 보자.


[ 지난 사랑의 기억 앞에서 냉정해지지 못하는 건 창피한 게 아니야. 고된 시간을 견뎌낸 자랑스러운 당신의 권리지.

그래.. 다 자기 입장이라는 게 있지.. 있지만.. 우리 나이에 안 한다는 말.. 더 신중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기회라는 게 그렇잖아? 주름이 다 뺏어가. 나이 먹을수록 잘 안 오잖아, 기회. 이 사회가 그래요.

그러고 보니까 안 하겠다는 말.. 나 해본 기억이 멀어. 그게 뭐라고 그런 말도 못 하구.. 왠지 슬프지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자기가 하겠다는 애들이 뒤에 백만 명이 서있어.

그래.. 한낱 신인 나부랭이 주제에.. 안 한다는 말을 뭐 그리 쉽게..

                                                    1권 3부 PP. 178~179]


   여기서 드라마를 보신 분들에게 문제 하나를 내 본다. 위의 글은 몇 명이 나눈 대화일까? 누구의 대사인지 맞혀보시라. 정답은 다음과 같다.


[ 효봉: 지난 사랑의 기억 앞에서 냉정해지지 못하는 건 창피한 게 아니야. 고된 시간을 견뎌낸 자랑스러운 당신의 권리지.

은정: 그래.. 다 자기 입장이라는 게 있지.. 있지만.. 우리 나이에 안 한다는 말.. 더 신중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기회라는 게 그렇잖아? 주름이 다 뺏어가. 나이 먹을수록 잘 안 오잖아, 기회. 이 사회가 그래요.

한주: 그러고 보니까 안 하겠다는 말.. 나 해본 기억이 멀어. 그게 뭐라고 그런 말도 못 하구.. 왠지 슬프지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자기가 하겠다는 애들이 뒤에 백만 명이 서있어.

진주: 그래.. 한낱 신인 나부랭이 주제에.. 안 한다는 말을 뭐 그리 쉽게..

                                                   1권 3부 PP. 178~179]


   그랬다. 아쉬운 점은 이거였다. 드라마를 보지 않고 대본집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누구의 대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대본집은 인물의 이름이 나오고 일정한 공간을 비운 후에 대사를 쓴다. 그렇다 보니 쭉 대본집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이름을 스킵하고 대사만 훑어 나갈 때가 있다.


   앞에서 리뷰했던 작품들의 경우, 주요 배역들의 대사는 이름을 보지 않고도 구분이 가능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대본을 읽어 나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시그널을 읽을 때, 재한, 해영, 수현의 대사가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며 펼쳐져도 누구의 대사인지 구별하기는 쉬웠다. 그만큼 등장인물마다 언어 습관이나 성격, 말투 등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멜로가 체질은 읽는 내내 계속 인물관계도를 확인해야 했다. 지금 읽는 부분이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 누가하는 대사인지 계속해서 이름을 확인하지 않으면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똥꼬발랄한 포인트들이 많아 계속해서 피식거리면서 읽지만, 어느 순간 극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힘든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범수와 진주가 대화를 이어가는데, 어느 순간 누가 범수이고 진주인지 알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또 작가님이 밝혔듯이 중간에 파란색으로 된 부분은 현장에서 급하게 추가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굳이 없어도 되는 부분인데, 실제 드라마에선 삭제된 것인가 싶었었다. 다시 보니, 현장에서 1회 70분 분량을 위해 급하게 추가한 부분이라고 해서 이해가 되었다. 분량을 위한 사족이었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바로 ‘용어 정리’였다. 인서트와 몽타주 빼고는 모두 시그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특히 극의 흐름을 이끌어 가면서, 매우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V.O)**는 용어를 정확히 알아야 내용이 이해되곤 했다.   


   어느 순간 스토리에 집중하기보다 대사에 집중하고, 인물들의 심리에 집중하다 보니 푹 빠지게 되었다. 왜 대본집이 굿즈마냥 나왔는지 결국 설득이 되고, 이해되었다. 순간순간 툭 던지는 대사들이 가슴을 툭툭 건드려서 어느 순간 푹 하고 터져버리는 그런 느낌.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인데, 그 심상함이 모여 순간의 특별함을 만들어 내는, 내 삶도 언젠가 저렇게 심상함이 쌓여서 결국 심상치 않게 빛나는 하루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대사가 인덱스 스티커를 붙일 정도로 특별했지만, 오히려 심상한 마지막 대사가 툭 마음을 건드린다. 왜냐면 오늘도 나는 그저 뭐 좀 그런 하루를 보냈기에. 뭐 좀.. 그래도 되는 나를 토닥여 주고 싶기에.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모두 멜로가 체질이기에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뭐 좀 그런 사람들이니까-.


[진주: (V.O) 우린 오늘도 맛있게 떠들고 맛있게 먹고 맛있게 사랑한다. 그 언제까지고 밤에 먹어야 건강한 라면은 나오지 않겠지만..

뭐 좀 그렇더라도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한 우리의 지금에 행복을 느끼며.. 만회할 수 있음을 깨달은 우리의 지금을 칭찬하며. 일단 맛있게..후루룩.    

뭐 좀.. 그래도 되잖아?


                       멜로가 체질 대본집 2권 중 16부 p524]


*입봉작: 영화감독이나 피디, 작가, 기자가 처음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독립적으로 하나의 작품이나 기사를 완성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한 첫 작품을 '입봉작'이라고 한다.(출처: 나무위키)

**(V.O):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마음이나 현 기분 상태를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극 중 상대는 듣지 못하고 관객만 들을 수 있다. (출처: 멜로가 체질 대본집 ‘용어정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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