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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Oct 30. 2023

자유롭지만 행복하게(Frei Aber Froh)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본집 리뷰


여기 재능은 없지만, 바이올린이 그저 좋아 뒤늦게 전공을 하게 된 그녀가 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인 서령대(드라마 속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에, 3수 만에 다시 음대에 입학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다만, 늘 실기가 꼴찌인 탓에 미래가 불투명하다. 경후 문화재단 인턴 자리만 남은 그런 여름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에 경후 문화재단 1기 장학생이다. 신은 그에게 넘치는 재능을 주셨다. 다만, 그 재능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을 허락지 않으셨다.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 여행을 다녔음에도, 현재 통장 잔액은 3백만 원 남짓. 서울 하늘에 방 한 칸 얻을 돈도, 연습할 피아노도 없다. 알고 있지만 외면해 왔던 현실만 마주하게 된 안식년의 시작이다.  


   서로 접점이라고는 하나 없던 그녀 채송아와 그 박준영이 만난다. 친구에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결국 사랑하는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 차곡차곡 쌓이는 두 사람의 감정과 서사를, 이 작품은 아주 세밀하게 그려낸다. 물론 둘 사이를 가르는 계급(음악적 재능으로 판가름되는)과 지난한 감정의 부채 등이 둘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통해 두 사람은 성숙하고 성장한다.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꼭 자라는 것만이 아닌, 어떤 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좌절조차 성장이라 말한다. 그 옛날 윤동주 시인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담아 침잠했다면, 준영과 송아는 음악 안에 가라앉는다.


   윤동주 시인이 바닥을 향해 치달아, 결국엔 바닥을 딛고 나아갈 희망을 얻었다면, 준영과 송아는 잠깐 멈춘다. 그러고는 다시 점점 크게 커 나간다. 크레셴도는 ‘점점 크게’를 의미하는 악상기호다. 다르게 보자면, 크레셴도가 시작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작은 순간이기도 하고. 점점 더 자라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에. 그녀와 그는 지금 잠깐 숨을 고르고 멈춰서,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을 택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마음을 쏟아붓던 일을 잠깐 멈추고, 숨을 고른 그들은 이제 다시 자기의 힘으로 앞을 향해 걸어 나간다. ‘Frei Aber Einsam. 자유롭지만 고독하게’가 아닌, ‘Frei Aber Froh. 자유롭지만 행복하게’ 말이다.


   클래식 음악을 주로 다룬 드라마임에도 영상이 아닌, 대본집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대본집 곳곳에 적혀있는 세밀한 설정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대본이 바이올린 소리만큼이나 섬세하다. 작가님이 바이올린을 전공한 데다가, 실제로 이런 공연기획 쪽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공연과 관련된 내용이나 악기 위치 등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다. 때론 해당 연주 프로그램 포스터 문구까지도 대본에 언급이 될 정도다.


   또 다른 지점은 각 회차에 적힌 부제를 보는 재미다. 이 작품은 부제가 유명한 연주곡이나 악상기호로 되어 있다. 사실 1화를 제외하곤 모두 악상기호인데, 그 기호의 의미를 되새기면, 해당 회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뜬금없지만 왜 돌체라테가 그다지도 단맛을 지니고 있는지, 이 드라마의 9회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다. (9회 돌체 dolce: 달콤하게).



   물론 대본 자체가 지닌, 아쉬운 점도 있다. 아마도 이 대본집의 경우, 드라마를 n회차 이상 보았기에 발견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떤 대사를 읽으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지점이 꼭 나온다.


   ‘이런 성격을 지닌 인물이,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하는 부분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드라마에선 그런 부분들이 모두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대본의 한계를 감독님이 완벽히 감싸 안아 웰메이드 드라마로 탄생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필자는 당신에게 드라마 보기를 권한다. 이 드라마를 영상으로 보게 된다면 잔잔하게 이어지는 클래식 음악과 배우들의 명연기, 감독님의 뛰어난 연출까지 풍성하게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 대본집만 읽게 된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브람스 F-A-E 소나타 중 스케르초,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 1악장을 들으며 읽기를 권한다.    


   깊어져 가는 가을, 당신에게 건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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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뱉다

#100일의글쓰기시즌2

#쉰여섯번째

#에이뿔       

#브람스를좋아하세요

#드라마대본집#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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