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프렌즈’ 대본집 리뷰
A형 독감에 걸렸다. 원하지 않던 일이다. 병원에 걸어가는데,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기분이 든다. 몇 년 전, 독감에 걸렸을 땐, 수액을 맞자마자 거뜬해졌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수액을 맞고, 엉덩이 주사까지 맞았는데도 개운치가 않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내 의지대로 움직이던 몸이, 정신이, 통제를 벗어나 제각각의 속도대로 움직여 버리는 것. 늙어간다는 건, 어쩌면 낡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과 노인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디어 마이 프렌즈’다.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도시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 나올 법한 어르신들을 기대했다면, 조용히 되돌아가기를 눌러야 한다는 소리다.
예쁘고 아름다운 젊은 남녀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나이 든 분들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그레이 로맨스’도 없다. 뒤늦게 만난 첫사랑과의 여행은, 그녀의 요실금으로 인해, 쉬어가는 시간이 더 많다. 게다가 그녀가 치매란다.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아 헤매느라 동분서주한 것이 그들의 생활밀착형 로맨스다.
뭐 하나 특별한 것 없고, 때론 지독하게 현실적인 모습에 꺼려졌던 활자들이 가슴에 훅 들어와 박힌 건, 프로필 속 그들의 나이 때문이었다. 45년생부터 52년생까지인 그들의 나이는, 48년생 사진 씨와 49년생 성심 씨를 떠올리게 했다.
평생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조차 배를 타고 다녀온 사진 씨에겐 42년생 석균이 투영됐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한 것도 비슷했고. 가망이 없다고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까지, 성심 씨와 이혼을 논하던 것도 그렇고 말이다. 결국 죽음을 앞두고, 해 질 녘 노을을 바라보며 사위에게 성심 씨를 부탁하던 그 마음도 어쩐지 석균과 닮아 있었다.
48년생 성심 씨는 석균이 아내인 정아와도 닮았고, 어느 날 치매에 걸려버린 희자와도 비슷하다. 사진 씨는 사위에게 장모님을 모시고 살라 했지만, 정작 성심 씨는 혼자 잘 살 수 있노라 선언했더랬다. 희자처럼.
어쨌든 그저 남의 이야기라 여겼던 것이 사진 씨와 성심 씨로 치환되니, 대사 하나하나, 감정 하나하나가 다가오는 게 달라졌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화자인 완이가 내 또래였다. 저렇게 매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결국 나였다는 사실에, 더더욱 가슴이 저릿해졌다.
특히 4화에 나오는 완이의 내레이션은 눈물 버튼이 되어버렸다. 이제 정말 안고 싶어도 안지 못하는 사진 씨와 성심 씨가 생각나 버렸기 때문이다. 입 속의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이 말이다.
완(N) 민호는 솜사탕을 들고 자는 희자 이모를 보며, 문득 이모가 제 입안의 솜사탕처럼,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그날 민호는 만화영화가 두 번 세 번 반복해 나올 때까지, 오래도록 이모를 안았단다. 언젠간 엄마를 이렇게 안고 싶어도, 안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테니까.
-‘디어 마이 프렌즈’ 4부 씬 52 中 -
어쩜 대사를 이렇게 쓸 수 있는지 감탄을 하지만, 그뿐이다. 역시나 작가님의 대본집을 전자책에서도, 책장에서도 쉽사리 꺼내 볼 용기가 들진 않곤 한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의 드라마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감정 소모가 극심하기로 유명한 작품들이기에 지레짐작으로 영상으로 보는 것을 피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가님은, 노희경 작가님이다. 수많은 그녀의 대본집 중에 이 작품을 꺼내든 건, 영상이 아니니 울음바다가 울음강물로 축소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이니 울음냇가 정도에서 그칠 거란 기대도 했었고 말이다.
오산이었다. 교만이고 자만이었다. 전자책이 대사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했다. 전자책을 읽는 내내 손가락이 화면을 스치듯, 눈물이 내 뺨을 훑어 내렸다. 성심 씨와 사진 씨가 투영되니, 울음바다로의 진입이 어렵지 않았다.
아프고 보니 더욱더 깨닫게 됐다. 정아, 난희, 희자, 충남, 영원, 쌍분의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이자 먼 이야기만은 아니란 것을, 나도 지금, 이 순간 그들처럼 늙고, 낡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그저 그렇게 늙어가는 ‘노인’이 아니라, 그들처럼 ‘어른’이 되어가고 싶단 소망을 갖게 했다.
그 언젠가 그런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늙다’는 동사인데, ‘젊다’는 형용사라고, 오늘의 젊은 상태들이 모여 늙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 친애하는 나의 늙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성심 씨와 사진 씨의 바스러짐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어른으로 늙어가겠다고, 낡지 않으리라고. 늙음을 향해 가더라도, 지금의 나는 언제나 젊은 그 자체로 있을 것이라고.
친애하는 나의 친구, 오늘의 젊음, 내일의 늙음에 고하노니, 부디 낡아지지는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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