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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Jan 08. 2022

누군가의 보통이 다른 이의 보통을 침범할 때

‘오월의 청춘’ 대본집 리뷰

‘오월의 청춘’은 1980년, 오월, 광주, 이 세 가지의 키워드를 가진 드라마였다. 어쩐지 보기가 망설여지는 이야기였기에 드라마는 물론, 짧은 영상마저 본 적이 없다. 그때의 이야기를 피하는 건,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주는 어떤 아픔 때문이다.


   1980년 오월의 광주를 떠올리면, 누군가 내 심장을 꽉 조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그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무지함에 대한 반성이자, 여전히 계속되는 그들의 아픔에 손톱만큼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함 때문이며, 끝까지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지 않고 죽어버린 누군가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오월의 청춘 영상을 배경으로 여러 음악을 들려주는 플레이리스트 영상을 보게 됐다. 댓글에 달린 드라마 속 대사를 접하게 되었고, 마침 대본집이 있다는 말에 부랴부랴 대본집을 구매했다. 구매하고도 한참을 망설인 끝에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말이다.


   예상과 달리, 대본집 속 오월의 청춘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초반의 많은 부분은 KBS 1 TV에서 하던 아침드라마, TV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대본집을 읽는 내내, 그 누런 필터를 낀 화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련하고 투박한 그 시절의 풍경들이 펼쳐졌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간호사 일을 하며 유학 준비를 하던 찰나, 비행기 푯값을 구하기 위해 친구 수련 대신 맞선에 나간 여자 주인공 명희. 혼외자로 태어나 서울대 의대 수석합격을 했지만, 권력에 기생하는 아버지의 돈과 권력을 증오하면서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채, 대학가요제만 준비하는 남자 주인공 희태. 두 사람이 뒤바꾼 맞선 상대로 만나 벌어지는 전반부의 내용은 그 어디에도 1980년 오월의 광주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저 보통의 오월 속 청춘들일뿐.


    조금은 촌스러우면서도 간질간질한 두 사람의 사랑이 펼쳐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별거 아닌 주인공의 대사에서 가슴이 콱 막혀 오며 눈물이 흘렀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이들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싶은 소박한 이들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하는 그 순간이 나의 마음을 건드렸다. 더 큰 힘을 쥐기 위한 누군가의 보통이, 평범한 이들의 보통을 건드릴 때 벌어진 그 암담한 일들이 툭툭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길을 가다가 군인의 곤봉에 맞아 뇌출혈로 죽을 뻔한 주인집 여고생 진아,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군인들에게 반항했다가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지는 수찬,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코치님 몰래 합숙소를 나갔다가 총에 맞을 뻔한 정태와 명수.


   오월의 청춘은 그런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의 상처를 강요하는 슬픔이 아닌, 먹먹한 아픔으로 그려내는 작품이었다. 그저 학원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거래처를 다녀오는 길이었으며,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화방을 다녀왔을 뿐인데, 그 수많은 이들의 보통이, 순식간에 심상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그 작은 행위들에 목숨을 잃게 되었고, 생사를 오가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누군가가 유지하고 싶은,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소수들의 보통을 위해서 말이다.


   명희와 희태는 그 보통이 침범당하는 광주를 끝내 떠나지 못했다. 둘만의 보통을 위해, 광주를 몇 번이나 떠나려고 했지만, 결국 떠나지 못했다. 극 초반에 나온 명희의 대사처럼, 간호사와 의사이기도 한 그들은 다른 이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지언정, 신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광주가 철저히 침잠하는 그때,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광주를 벗어나려는 명희의 어린 동생 명수를 찾으러 나갔던 길에서, 희태와 명희는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5분 뒤에 보자는 그 약속은 영영 지켜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어도 풀벌레 소리가 도와주면 괜찮았던 그 오월의 밤이, 그 둘의 오월이, 거기에서 멈춰졌다.


   그 오월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각자의 보통 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심상한 오월을 지난 그들이었기에, 보통을 향해 가는 지독한 몸부림을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앞에 41년 동안 찾아 헤맨 명희의 유골과 유품이 인계되었다. 결국 41년의 기다림 끝에 희태가 명희의 유품을 받아 든 그날도 오월이었고, 명희를 기다린 지 사십 한 번째 오월이었다. 그때 희태가 써 내려간 편지 속에, 지난한 41년간의 지독한 기다림의 시간들이 오롯이 명희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며 드라마는 끝이 난다.   


   대본집을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편지 내용을 활자로 확인할 수 있다는 먹먹함 때문이었다. 배우들의 훌륭한 내레이션도 참 좋지만, 찍어낸 듯한 활자 속에 느껴지는 그 담담한 슬픔이 때론 더 마음을 두드리곤 한다. 게다가 오월의 청춘 대본집은 드라마에서 소품으로 썼던 편지를 뒤쪽에 실어 놓았다. 희태가 쓴 편지와 명희가 썼던 서약서 조각을 시각적으로, 활자로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은 더더욱 이 이야기를 심상하게 느끼게 했다.

대본집에 실린 (좌) 희태의 편지, (우) 명희의 혼인 서약서


   작가님은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통곡과 낭자한 피, 함성과 매운 연기로 가득했던 80년 오월의 광주. (중략) 그곳에서 울고, 웃고, 사랑했던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로 매년 돌아오는 오월이 사무치게 아픈 이들에게는 작은 위로를, 이 순간 각자의 오월을 겪어내는 이들에게는 그 오월의 불씨를 전하고 싶다.”라고.  


   1980년 오월의 광주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린 또다시 누군가의 보통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의 보통날이 침범하는 슬픔을 느껴야 했다. 80년 5월의 아픔도 아직 해결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아픔이 우리를 덮쳤다. 작가님의 서문과 그런 마음으로 쓴 오월의 청춘을 읽으며, 이젠 그 아픔들이 그저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됐다.


   다시는 이 땅에 누군가의 보통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보통을 앗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 모두의 보통이, 보통의 날들이 안온하게 지켜지기를. 눈부신 오월처럼 각자의 보통들이 언제나 싱그럽고 눈부시게 아름답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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