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전거 탄 달팽이 Jan 13. 2022

미스 함무라비를 놓치고,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미스 함무라비’ 오리지널 대본집 리뷰

우리 집은 법원뷰다. 오션뷰도 한강뷰도 아닌 법원과 검찰청, 구치소뷰. 어렸을 적, ‘애드버킷’ 같은 법정 드라마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를 법원을 바라보고 산다.


   겉에서 보는 법원은 고요하기도 하고, 소란스럽기도 하다. 아침이나 점심에는 우아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건물은 소리하나 없이 고요하다. 그러나 법원 앞은 늘 소란스럽다. 소송 결과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는다. 출퇴근하는 판사의 차량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미스 함무라비를 꺼내 든 건, 내가 겉에서만 지켜보는 그곳에서, 직접 살아가는 이의 목소리가 궁금해서였다. 집필 당시만 해도 실제로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일하면서, 동명의 소설까지 쓴 분이 미스 함무라비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진짜 판사가 그려내는 판사들의 이야기라니, 궁금했다.


   막상 읽어보니, 오히려 미스 함무라비는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판타지적 느낌을 더 가득 안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 노골적으로 그들의 삶을 평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공이 있는 서울중앙지법 민사 44부 재판부 부장 한세상, 우배석 판사(주: 법정에서 재판장 오른쪽에 앉는 배석판사. 선임. 출처: 대본집 각주) 임바른, 좌배석 판사이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박차오름.


   그밖에 성공충, 배곤대, 정보왕 등의 다양한 인물들의 이름은 그들의 생각과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만, 작가님은 주인공들의 이름처럼 이 세상이 바르고 옳은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법원이 그런 판사들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지만, 실제 하지 않는다는 아쉬움만이 잔뜩 묻어나는 판타지였다.


   1화부터 이 드라마는 웃음과 함께 이 드라마가 나아가는 지점을 분명히 하고 간다. 44부로 초임 발령을 받은, 음대 출신 여자 판사 박차오름은 첫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성희롱하는 윤리교육과 교수를 니킥으로 잡는다. 그 이야기는 신문을 장식하고, 그걸 보며 피해자를 향해, 왜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희롱을 하게 만드냐는 막말만 돌아오는 걸 보며, 박차오름의 성질머리가 바로 박차 오르게 된다.


   바로 다음 날, 박차오름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법원에 출근한다. 복장이 그게 뭐냐는 한세상 부장의 말에, 조신하게 옷을 갈아입고 온다더니, 눈만 빼놓고 전신을 가리는 니캅을 입고 나타나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부조리한 것들에 온몸으로 부딪치는 느낌으로 말이다.    


출처: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공식 홈페이지


   그 이후로도 미스 함무라비로 지칭되는 우리의 주인공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판결하게 되고, 다양한 사건들을 일으키게 된다. 박차오름은 모두를 불편하게 존재였다. 법원 앞에서 1인 시위하는 할머니의 말을 외면하지 않고, 무료로 좋은 변호사에게 변론을 받을 수 있게 연결해 주며, 성희롱으로 해고한 부장을 복직시키려 하는 대기업의 꼼수를 파헤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부장판사의 무리한 업무지시로 유산을 한 동료 판사를 위해, 연판장(주: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 출처: 두산 지식백과)을 돌리고, 전체 판사 회의를 소집하려 하는 등의 불편함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이 밝히셨듯, 이 작품은, 어쩐지 불편하고 꺼끌거리는 박차오름이란 존재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녀를 그저 안정을 해치는 위협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매우 불편해했던 임바른이 천천히 그녀를 이해하고 변화하여, 철저한 개인주의자에서 종국에는 다른 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는 존재가 되듯 말이다.


   반면, 그녀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자, 그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며, 위키피디아에 박차오름 항목이 생기면 다 쓸 수 있다던 NJ 그룹의 후계자인 민용준은, 그녀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여, 그녀의 불편함을 잘라버리려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와 연결되었으며, 그녀가 계란이 되어 스스로 부딪혔던 벽이, 결국 NJ 그룹이란 걸 깨달았을 때, 그는 그녀를 철저히 제거하려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를 희생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 이중적 관점 앞에서, 작가님은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 같지만, 놀랍게도 아주 가끔은 세상이 바뀐다.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꼭 해야 되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질문을.” 계속해서 바위를 치다가 종국에는 깨지고야 마는 계란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계란 편에 섰던 박차오름에게, 그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은 위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 알의 작은 밀알이 되어 싹을 틔우는 것처럼,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질문이 박차오름이 아닌, 다른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모습으로 조금이나마 변화함을 암시하며 이 드라마는 끝이 난다.


출처: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공식 홈페이지


   이 작품의 경우, 대본집으로만 보고 영상은 거의 보지 않았는데, 대본집과 영상이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서나 디테일한 부분이 조금씩 달랐고, 지문에는 ‘화내며’라고 되어 있는 글이, 배우의 무표정하고 냉정한 연기 덕에, 더 분위기가 살아나는 경우도 보였다. 그러면서 영상 밑에 있는 댓글 하나를 봤다. 마지막 회 영상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하나 있었다. ‘미스 함무라비, 함무라비를 그리워하는.’


   결국 작가님은 그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꿈속에만 존재할 것 같고, 판타지 동화 속 이야기에만 존재할 것 같은 함무라비를 놓치고 있다고. 다만, 그 미스 함무라비를 놓치고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언젠가 진짜 ‘미스 함무라비’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시 법원을 바라본다. 지는 석양 속에 서 있는 법원을 바라보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미스 함무라비는 무엇일까,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그립다, 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벽에 자신의 몸을 내던질 줄 아는 미스 함무라비가. 그러면서 나는 과연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이었던가 자문하며, 그녀를 그려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의 보통이 다른 이의 보통을 침범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