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인 척 스며들기

오늘의 음료_빙홍차

by 여느진

2020년 9월 7일, 오후 11시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이다. 빠르게 씹어 넘기는 일을 잘 못하기도 하고, 위가 약한 편이라 허겁지겁 먹고 나면 꼭 배가 아프다. 급식을 먹을 적엔 친구들이 잔반을 정리할 때 내 식판은 절반도 비워지지 않곤 했다. 대학 친구는 내게 소개팅을 시켜줄 때, 상대방에게 '먹는 게 정말 느리고, 면류는 특히 느리니까 메뉴 선정에 유의해.'라고 말했었다. 같이 먹는 사람이 다 먹고 나를 기다리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이 오롯이 나를 위해 쓰이고 있다는 거니까. 그 순간에 내가 건넬 수 있는 건 짤막한 말 몇 마디와 서두르는 모습뿐이다.


이런 내가 유일하게 상대를 기다릴 수 있는 장소는 카페다. 음료를 마시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 음료가 진하거나 일이 바빠 목축일 틈도 없는 때를 제외하고는 얼음만 남아 덜그럭 거리는 잔을 빨대로 휘저으며 상대의 말을 듣는다. 한 잔을 더 시키는 일도 잦다. 빠르고, 맛있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게 해주는 이 음식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특히나 일할 때는 어떤 종류의 액체든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요즘 내가 빠진 음료는 빙홍차. 원래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꼭 마셔야 몸이 굴러가는데, 카페인 탓에 눈뜬 채 보내는 새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때문에 카페인을 줄일 겸, 좋아하는 가수가 한 번 마신 적 있어 익숙한 이 음료를 도전해봤다. 마라탕과도 어울리고, 적당히 새콤한 맛. 처음 맛 본 날에 바로 한 박스 주문했다. 오늘 아침도 한 병 비웠고, 일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가 오류 떠서 신경질 나 노트북을 닫았을 때도 한 병 가져와 천천히 마음속 열기에 뿌렸다.


홍차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 홍차 함유량은 0.32%. 홍차인 척하면서 내 삶의 틈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어쩌다가 만나,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가는 오늘의, 어쩌면 일상의 음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