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붙잡고 있다. 자신의 마음은 변하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합리화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이 변한 것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한다. 이미 마음이 다 떠났고 원망만 남아있고 금전 문제만 남아있는데 사실을 다 알면서도 그 설마라는 끝자락을 아직도 붙잡고 있다.
부모님이 나의 생성의 근원임을 아는데도 그것은 법리적으로는 아무 상관없고 오로지 증거만 중요하더라. 평소에 살아가면서 부모님과 따뜻하게 외식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누가 증거를 남기고 채집하나. 그런데 그때의 현금영수증, 그때의 카드영수증이 증거라고 하니 씁쓸하고 착잡했다. 오히려 나를 감시하는 듯한 카메라가 감사할 때가 있다.
요즈음 마음에 한 점을 찍은 드라마가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내 마음의 결과 같은 결일 것 같은 드라마였다. 두 여자의 이별과 재회를 다룬 드라마인데 그래, 그때 나도 그랬어라는 울림이 있는 대사들이 좋았다.
”은중이는 끝까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지키더라. “
상연은 은중을 늘 찾는다. 은중은 상연을 밀어내면서도 찾아오는 상연을 도와준다. 상연의 마음은 은중이가 받아줄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안다. 아니까 받아주고 알면서도 밀어낸다. 이해 관계없는 것이 정말 티끌이 없고 깨끗한 것일까. 은중과 상연은 그 이해관계를 넘어서있는 듯이 보인다.
그 둘은 세 번의 이별을 가진다. 헤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마치 다시 만나면 너에게 이러한 내 모습을 보여줄 거야라는 듯이 처절하게 열심히 살아간다. 삶을 성실하게 살아낸다. 그리고 은중은 상연의 마지막을 너무나도 따뜻하게 바라보며 함께 해준다.
내가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어디 지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잔잔해진 마음의 진동을 오랫동안 느끼고 있었다. 과연 나의 마지막을 저렇게 따뜻하게 바라보고 미소를 보내는 이가 지금 내 곁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훗날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현재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도 나의 민낯 그대로 공유하고 소통한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시간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 그 시간의 양을 견뎌내는 것이 지나놓고 나면 감탄이든 자랑이든 하는 것이다. 등산을 할 때도 올라갈 때는 흙과 바위와 나무 밑동만 보였는데 올라가서 정상에 서있고 보니 세상이 전체가 한눈에 담긴다. 그 순간에는 올라올 때의 힘듦과 어려움을 잊는다. 내가 몇 시간 걸려서 그 많은 시간을 올라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견뎌보자. 견디는 것, 그 과정에 머물러 보자. 과정에서 보이는 사실들에 집중하고 흥미를 느끼자. 때로는 결과가 그 모든 과정을 말해줄 때도 있다.
그래서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정신 차려. 형부는 돌아오지 않아.”
언니는 이혼 준비과정의 그 긴 여정을 어찌 견뎌낼지 과연 이 가냘픈 여자가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을 오롯이 오십 중반의 나이의 한 흔들리는 여자가 버티어야 하는데.
흔들리는 언니를 바라보면서 나는 왜 그렇게 언니에게 이혼을 강력히 요구했을까를 되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