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Mar 30. 2023

쓸모없는 여동생

몹시 미워했다. 미안해.


주변을 보면 참 다정한 남매들이 있다. 오빠가 여동생을 끔찍이 예뻐하면서 잘 놀아주고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말이다. 자랄 때, 우리 남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의 오빠와 나는 서로의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는 오빠라는 이유로 늘 대접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오빠를 미워한 날들이 많았다고 하는 것이 맞다. 반대로 오빠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늘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를 미워했을 것 같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지만, 할아버지의 환갑잔치 사진 속에 남아있는 우리 둘의 모습은 이렇다. 큰 손자를 정말 예뻐하셨던 할아버지의 무릎에는 대여섯 살 정도 나이의 오빠가 앉아있고 그 보다 더 어린 나는 색동 한복을 입고 그 옆에 앉아있다. 그런데 오빠는 나를 향해 마치 꿀밤이라도 때릴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리고 있고, 나는 오빠를 향해 잔뜩 찡그리고 울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톰과 제리의 사이가 되어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웅다웅하면서.


초등학생 시절에는 저녁을 먹기 전 오후 대여섯 시 쯤에는 텔레비전에서는 만화가 방영되었다. 오빠와 나는 텔레비전 채널을 두고 다투기 일쑤였기 때문에 엄마는 시간 배정을 해주고 1미터 정도 떨어지게 둘의 텔레비전 시청 고정 자리를 만들어주셨더랬다. 텔레비전 보는 동안은 절대 서로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말고 조용히 텔레비전을 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시는 사이 우리 둘은 또 티격태격했다. 마침 퇴근하시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셨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벌을 받았고,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창고로 치워버리셨다. 정확히 얼마 동안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게 꽤 오래 우리 집은 텔레비전 없이 지냈던 것 같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던 오빠는 골목대장 스타일의 존재감 있는 소년이었다. 나는 인형 놀이와 분홍색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녀 스타일이었지만, 앙칼진 구석이 있어서 오빠에게 절대 그냥 지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니 오빠에게 나는 오빠가 늘 말했던 것처럼, ‘하등 쓸모없는 여동생’이었다. 함께 대장놀이를  하며 동네를 누빌 수도 없었고, 오빠의 기준에서는 장난친 것인데 쉽게 토라지고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에게도 오빠는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언니들처럼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심부름만 시키고, 장난친다고 하는 일은 주로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덩치도 좋고 인물도 좋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아들이었지만, 그런 잘난 오빠 때문에 나는 상대적으로 못난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다.


다행히,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다투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오빠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아졌다. 우리 둘 다 머리가 굵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고,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단 둘 뿐인 남매 지간이라는 유대감이 생겼다. 아버지가 퇴직하시고부터는, 앞으로는 부모님을 함께 봉양해야 하는 어른이라는 일종의 공통 책임감이 생겨서 일 수도 있다.





뉴질랜드행을 결정할 때,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다. 마흔이 다 된 성인이었고, 내가 살 곳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말이다. 상의를 했더라도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을 짓고 통보하듯이 말씀을 드렸을 때는 많이 서운하셨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남들 다 있는 자녀도 없이 사는 모습이, 정년이 보장된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외국으로 가는 것이 부모님께서는 마치 당신들의 할 일을 다 못한 것처럼 안타까워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부모님과도 상의를 안 한 일인데, 오빠와 이민에 대해 상의했을 리 없다. 그저 마음으로, 생각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오빠가 있어 내가 마음 놓고 떠나는 거야. 고마워.’  


철 없던 시절에는 부모님이 오빠만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 오빠가 그렇게 미웠다. 오빠가 나를 한 번도 귀여운 동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에 속상했다. 오빠가 쓸모없는 동생이라고 나를 여겼듯, 나도 오빠대신 언니가 있어야지 왜 쓸데없는 오빠가 있는 거냐고 맞받아쳤다. 지금은 오빠가 조금도 밉지 않다. 오빠의 존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부모님 곁에 오빠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빠가 과거에 나에게 말했듯, 나는 이제 정말 쓸모없는 동생이 되어버렸는데, 오빠는 지금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허나, 여전히 직접 말로 전하기는 부끄러운 현실 남매 사이라 마음으로만 늘 생각하고 산다.


‘오빠. 어릴 때 미워해서 미안해. 조카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고모가 이렇게 멀리 살아 만나지도 못하고 미안해. 다정하고 쓸모 있는 동생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10년후 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