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하며 그것들로 나의 삶을 채워 나갈 것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 흙이 뭍은 손에 튤립 모종을 들고 마땅한 자리를 찾고 있다. 봄 햇살이 가득 품은 정원에는 많은 꽃이 계절에 따라 피고 진다.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진달래가 피고, 천리향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질 때쯤 무스카리 순이 얼굴을 내민다. 차례로 수선화가 피고, 튤립이 올라온다. 봄은 피어나는 계절이다. 겨우내 땅속에 묵혀 두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르고 시작하고 아침에 비치는 햇살마저 향기롭다.
여름이 되면 수국이 청보라색 꽃망울을 터트린다. 정원 가득 피는 수국은 동네에서 명소가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서서 사진을 찍는다. 여름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은 쓸쓸함이 바람을 타고 담을 넘어 낙엽을 이리저리 흩어지게 한다. 여름내 잘 자라준 가지들을 정리하며 수확한 모과로 겨울 내내 먹을 모과차를 만든다. 겨울의 정원은 앙상한 가지들이 누가 더 슬픈지 뽐내는 듯 더 애처롭게 보인다. 겨우내 푸르른 소나무와 유칼립투스가 정원의 삭막함을 달래준다.
10년 전 나 자신과의 약속했던 것처럼 오늘도 여념 없이 정원을 가꾸고 있다. 매일 60평 남짓한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10년 전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에 지쳐서 이때까지 이뤄놓은 것 없는 불안감과 절망감 그리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들을 붙들고 힘들어했다.
그럴 때마다 정원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다. 꽃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졌다. 정원이 예쁜 카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삶의 가치를 미래에 더 많은 부에 두고 살아가다 보니 이런저런 현실의 이유로 실천하지 못했다.
여태껏 열심히 살아왔는데 지금 순간을 미래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행복만 쫒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인생도 아니었다. 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살다 가끔 하늘도 보며 여유를 부려봤지만 늘 그때뿐이었다.
‘너를 짓눌리는 것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명심하라’ ‘현재의 이 시간을 너 자신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만들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록한 명상록의 내용이다. 책을 읽다 한 참 명상에 잠겼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후회가 없을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게 맞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래를 위해 뭘 하기보다는 이제는 현재의 시간에 충실해지고 싶어졌다. 나를 위한 현재의 시간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용기도 필요했다. 남편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시아버지께서는 정원사가 되어 주시기로 하셨다. 가족의 든든한 지원 아래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는 공부는 힘들지 않았고, 재미가 있었다. 10년 전 시작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색깔이 있는 일상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들은 보면서 오래전 꿈꿔왔던 바람들을 실천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 깨닫지 못했다면 소중함과 감사함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일에 쫓겨 흑백처럼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다.
돈벌이 수단이 아닌 나를 나답게 해줄 새로운 일을 찾아 세상에, 잣대에 맞춰진 성공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일을 만나게 해준 그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하며 그것들로 나의 삶을 채워 나갈 것이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노애락애오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