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떼고 말하는 사회

우리, 계급장 떼고 말합시다.

by 진솔


남자들에게 계급장 떼고 말하자는 의미는 뭐야?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시대에 계급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군필자 남성들에게 물었다.


“똑똑. 당신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그럼 윗사람이 저 얘기를 해도 그런 건가?”

“그렇게 좋은 의미는 아니지.”


예상하였던 바였지만, 역시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계급장을 떼고 말하자.’니! 이 시대에 얼마나 어울리는 말인가. 그 말이, ‘싸우자.’와의 동의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씁쓸하다.


다 크고 보니 매우 파격적이었던(?) 집안 환경에서 나고 자란 덕에 한국 토박이로서 산 것치고는 이 사회에 만연한 (나이와 직업으로 대표되는) ‘계급장 의식’을 꽤 늦게 안 편이며, 요즘도 가끔 놀라는 편이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속의 어쩌다 있을 법한, 혹은 과장된 이야기쯤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아버렸고, 꽤 분노하는 중이다.


분노하는 방법의 하나로 선택한 것이, 초면에 나이와 직업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직장인이 되어 느낀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쉽게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게 나이와 직업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학생 때는 이것이 성적과 학교였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매우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도전해보았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적어도 직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신조로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나의 친구들은 나를 다양한 호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린 친구들은 누나 또는 언니가 편하면 그렇게 부르긴 하지만 대부분 각자의 편한 방식으로 나를 부른다. 그 때문에 나이대가 다양한 친구들 여럿이 함께 만나면 나를 부르는 말이 솔님, 센세, 너, 누나, 언니 등 아주 난리가 나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미 우리 사이가 더 가까워지려 할 때 나이는 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또한, 친구들의 직업과 직책 이야기보다 그들 자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고 시작한 관계라, 서로의 직업을 알게 되었을 땐 그저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게 된 느낌과 같았고, 지금도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디 학교에 다니는지, 학교에 다니는지, 다니지 않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가끔 그들이 몇 살인지, 어디 회사에 다니는지 자주 까먹는다.)


대신 나에겐 중요해진 것들이 있다. 오늘 본 영화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다른 사람은 별로라고 했는데 내 맘에는 쏙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들어줄 수 있는지, 누군가 던진 괴상한 생각에 깔깔대고 웃어줄 수 있는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왜 그런 거지?”라고 궁금해하는 누군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내가 그 나이 땐…”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아도 진정한 위로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인지가, 나에겐 중요하고, 그때 우린 친구라 말한다.




하지만, 내 직업은 겉으로 보기엔 계급장이 꽤 필요한 직업으로 보인다. 학생들에게 교사라는 계급장으로 학급을 이끌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나는 초등교사다. 물론 계급장을 혐오하는 나도 30명 남짓의 아이들과 친구를 먹을 수는 없다. 우리가 ‘선을 지킨다.’라고 이야기하는 배려와 존중의 개념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것은 참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친구를 먹는 대신, 나는 아이들에게 믿음을 얻고자 했다. “우리 선생님은 나를 10살 남자, 여자아이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한다.”라는 믿음. 3월 한 달 동안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무서운 선생님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주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라포르를 형성한다.”라고 한다. 라포르가 형성되지 않은 교실에서 교사가 혼을 내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극심하게 불안을 표현하거나,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라포르를 형성하고 나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엄하게 혼을 내도 다시 나에게 돌아오며, 10살의 어린 아이들도 선생님을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한다.

교장님이 아침 등교시간을 활용해 1분 말하기를 하라고 갑자기 시키셨다. 내 방식대로 장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오늘, 한 아이가 자기 자리를 청소하다 내 책상이 있는 자리까지 청소를 해주려고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 자리는 선생님이 할게.”라고 얘기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순간, 나를 반성하게 했다.


“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저는 여기까지 청소를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방금 제가 00이 자리도 청소해줬어요.”

아이에겐 짝꿍의 자리나, 나의 자리나 똑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우리가 숫자와 직업으로 대표되는 명사에 과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길 바란다.

물론, 권위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 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계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믿음에서 올 때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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