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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Mar 10. 2020

연애하면 아픈 병


 엄마께 전화가 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1. 심심하다.

 2. 아빠가 소소하고 재미있는 사건을 일으켰다.

 3. 좋은 아이템이 생겼다. 특히 건강템.

 셋 중 하나가 분명하다.


 “ 솔아, 홍삼 먹을래?”

 이번엔 3번이었다. 내가 한사코 거절했으나, 엄마는 이번에 좋은 홍삼 거래처(?)를 뚫어놨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집에 올 때 가져가라고 하신다. “아니, 엄마가 먹어야지, 왜 내가 먹어. 엄마 나이에 더 챙겨 드셔야지.”라고 말해봤자 “내가 먹으면 살쪄.”라는 강력한 한마디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결국, 나는 이번 주말에 홍삼을 두둑이 챙겨 오게 되겠지.


 어렸을 땐 그 흔한 잔병치레도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성인의 나이가 되고 나서는 엄마의 걱정 레이더가 나에게 집중할 만큼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주 아프곤 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20살부터 혼자 살면서 시작된 것 같다.


 부모님, 동생과 함께 살았을 때, 즉 유년의 나는 참으로 덤덤하고 건강하던 아이였다. 그것은 아마도 매일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아침 밥상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잔소리, 나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되어주던, 온 가족이 모였던 저녁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하는 자취 생활 라이프는 나에게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책임을 주었다. 집안일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내 감정에 대한 책임까지 말이다.


 집안일에 대한 책임은 시간이 갈수록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한 몸 건사할 정도가 되었지만, 감정에 대한 책임은 그 속도가 참 더디었다. 특히 가족들과 떨어져 본 적이 없던 나는 나의 외로움을 책임질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채 오롯이 혼자 보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결과는 외롭고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결국, 그런 내가 선택한 방식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상은 주로 ‘남자 친구’였다.


 24시간 남자 친구와 붙어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찾아오는 심심함과 외로움을 연락을 더 자주 하는 식으로 남자 친구가 책임지도록 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의 불안과 상실감을 남자 친구가 해결해주길 바랐고, 역시나 좋은 일이 생기면 나의 기쁨을 반드시 함께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부작용을 가지고 왔다. 연애만 하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게 연애만 시작하면 평소보다 쉽게 우울해지고 감기도 잘 걸렸다. 원래 좋지 않던 곳이 더 아파지거나 부상이 잦아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남자 친구에게 자주 하는 말은 ‘어디 어디가 아프다.’가 되었다.


 그때 몸의 외적인 부상은 (길을 걸으면서 카톡을 하는 등) 대부분 연애에 온 신경을 쏟다 보니 부주의로 인해 생긴 부상들이었고, 내부 장기에 일어난 각종 질병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프기도 했지만,) 절반은 양치기 소년의 말과 비슷했다. “나 아프니까, 나한테 신경 좀 써줘.”라는 말을 “나 아파.” 이 세 글자로 축약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연애 초반에는 이 말은 아주 큰 효과를 보이지만 세상 대부분 거짓말이 그러하듯, 나 자신도 의심쩍은 잦은 빈도의 “아파.”는 상대의 대수롭지 않음과 무관심, 즉 ‘질림’을 동반한다. 그럼 나는 정말 아파진다. 내 연애가, 반응하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에. 상대가 더는 “많이 아파? 내가 갈까?”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가 마지못해 “아니야, 좀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식의 답을 하지 못하면 불안감에 의해 정말 아파지고는 했다.




 책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김수현 작가는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구하는 건 자기 삶의 통제권을 내던지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나는 나의 삶의 통제권을 ‘남자 친구’라는 존재에게 내던지고 있던 것이다.

아니, 삶의 통제권을 넘기다 못해 나의 ‘질병 통제권’까지 그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지면 내 자존감은 올라갔기에 걱정이 없었고 그렇기에 아프지 않았다. 반대로 나에게 소홀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감정으로 쉽게 이어졌고 이는 나의 불안을 야기했다. 불안해진 나는 온 신경을 그 사실에 쏟았고 내 몸을 잘 챙기지 않았으므로, 각종 질병에 걸리기 딱 좋은 상태가 되었다.


 하루는, 이런 나와 헤어짐을 결심하고 그나마 좋은 끝을 만들기 위해 서서히 이별을 알리고 준비하던 A를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사귀기 전에 보던 나는 자주 아프거나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막상 사귀어보니 맞았고, 결국 질려버렸다는 것을. 언제나 그렇듯, ‘어떻게 붙잡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그는 이야기했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건 헤어지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나에게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이야.

추가로 그는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며, 자신과 나 둘 다 사랑이라 하기엔 너무 성숙하지 않다고. 각자의 일을 하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내가 감당하기 힘든 면이 있다’라며 이별의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별을 피하려고 하지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진단이 너무 정확해서 나는 “그래. 근데 나는 전남친이랑 좋게 끝낼 생각은 없어. ‘친구’ 이런 건 안 했으면 좋겠네.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라고 겨우 내뱉고는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아직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만큼 선명하게 남은, 그의 팩트체크 같은 이별에 실제로 얻어맞은 것처럼 며칠을 앓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프고 나니 그에게 참 고마웠다. 그와의 이별은 엄마의 홍삼 같았다.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챙겨주는 사람의 마음 덕분에 마음 한편이 꽉 차게 되는 홍삼. 그처럼 누군가 마음을 써준 용기 있는 이별 덕분에 아픈 것으로만 끝나지 않은, 어쩌면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의 연애는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다는 훈훈함이 아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덜 아픈 연애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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