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울 수 있었고, 아름다워야만 했던, 나의 첫 연애가 애매한 손톱자국을 남긴 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우편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래서 나름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예쁘고 밝은 친구들은 하나 둘, 자신만의 사랑을 시작했고 그 예쁜 얼굴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밥 먹을 때 똥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여튼,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사실 그 사실이 가장 잔인했다. 내 인생에 가장 예쁘고 빛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찜찜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X를 만났다. 그를 만난 것은 미팅 자리에서였는데, ‘미팅=술 마시고 노는 자리’의 등식이 일찍이 학습된 나는 신명이 나고 말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약장수처럼 입을 털며 흥이 오른 나를, X는 계속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 흥을 못 이겨 구석에서 지쳐있는 나에게 X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기회를 보고 있다가 결국 자기 친구를 보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야, 쟤가 너 맘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
라고 굉장히 티 나게 얘기했는데, 굉장히 지질했지만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게 꼭,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애가 생기면 친구를 시켜서 고백하는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라고 대답하니, 그는 그날, 밤새도록 나를 앉혀놓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줬다. 나중에 그의 친구가 몰래 말해주길, 잘하는 걸 나름 어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참 애같다고 생각했다. 노래방에 밤새 앉아있는 게 오지게 힘들긴 했어도, 그땐 그게 이유 없이 좋았다.
X는 연애도, 사랑도, 사람도 참 순수하고 맑았다. 열정이 넘쳤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그의 사랑을 받는 나도 처음으로 연애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나는 행복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의 첫 연애가 계속, 발부리에 걸려 나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좋은 것, 맛있는 걸 함께 하는 것이, 나를 그의 친구에게 소개하는 것이, 자꾸만 이전 연애와 겹쳐 보였다. 그도, 똑같을까? 혹시 내가 무얼 하는지 묻는 게, 정말 궁금해서 그런 걸까? 그도 나중엔 집착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였던 건, 그의 마음만큼 내 마음이 깊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이전 연애에서도 나는 ‘그가 날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그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서’ 헤어졌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게 아니라,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X를 만난 나는, 이전의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당연히 후유증을 겪으며 불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멍청하게도 그걸 몰랐다. 그냥 나는, 사랑하긴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황색 편지지 10장에 자신의 마음을 가득 담아온 날, 오히려 그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헤어짐을 말했고, 그는 펑펑 울다 결국 그날을 마지막으로 다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나는 의외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역시 그를 깊게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며 스스로를 비난하고 탓했다.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전공 수업을 듣다가 멍 때리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한눈에 들어온 강의실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가, 열심히 사는 사람이 좋다는 내 말에, 여기가 자신이 공부를 하는 곳이라며 보여줬던 그의 대학교 강의실이 생각난 것이다. 아, 그런 모습이 참 좋았는데. 그렇게 유난하게 나를 좋아하는 모습이. 아니 그의 예쁜 말투가, 사실 그가. 아, 나도 그를 무척 좋아했구나.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결말이 구질구질했던 첫 연애와 달리, 헤어지자는 말에 정말이냐며 수십 번을 되물은 뒤 다신 연락을 하지 않는 X를 보며, 오히려 나는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한 동안은 주황색의 편지지를 버리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그래도, X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가 내 첫 연애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그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놓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집에 데려다주는 걸, 편지를 써주고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날 소개하는 걸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후회와 생각뿐이었다.
이어서 나는 ‘그래도 이번엔 경찰서를 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닿았을 때, 미치도록 나의 첫 연애가 혐오스러워졌다. 이 순수하고 예뻤던 연애 앞에서 그런 생각이나 할 수밖에 없는 내가 싫어졌다. 이런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나 있을까. 이렇게나 좋은 사람도, 연애도 이 지경으로 만드는 내가 싫어졌다.
이후에 남자 친구와 싸우고, 헤어졌다며 눈물을 보이는 친구를 보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 이별의 이유를 친구들에게 똑바로 이야기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선 그 이전의 헤어짐과 상처를 이야기해야만 했고, 난 그걸 똥 얘기쯤으로 생각했다. 마카롱에 커피같이 예쁘게 달고 쓴 연애 얘기에다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똥 얘기를 할 수 없어서, 나는 더욱 친구들이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