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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ug 10. 2023

살쪄서 할 수 있는 말.

긁지 않은 복권에 대하여.

신혼 3개월 차. 나는 지금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하루하루 갱신 중이다.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도 20대 때만큼 마른 몸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찌저찌 베일로 팔뚝살을 가려가며 드레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나는 '결혼'이라는 명분으로 봉인해왔던 모든 것들을 해제했다. 네일 샵에 더는 가지 않았고, 운동은 간단한 산책으로 퉁치고, 곱창과 떡볶이를 흡입했으며, 배부름의 행복이 가시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다. 행복하다. 비록 등살이 접힐지라도. 


 불과 몇 년전 아니, 작년 전까지만 해도 1kg 증가에 기겁을 하고 당장 샐러드부터 찾았을 텐데, 나는 어찌 이렇게 된 걸까. 사실 나는 십수년간 다이어트를 해오며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다. 나는 긁지 않은 복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SNS를 보다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만 살집이 좀 있는 사람들의 사진, 영상 아래에는  "긁지 않은 복권"이란 댓글이 꼭 달려있다. 부럽다. 핸드폰 너머의 저 사람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날씬해져서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면 사람들은 "복권이 맞았다!" 감탄해줄 테니까. 거기서 오늘 성취감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복권 낱장짜리가 아니기에 후폭풍이 따른다. 감탄에 따라오는 부담감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오, 맞아맞아. 하며 보던 지난 날. 나는 의문이 들었다. 복권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저 사람 자체가 복권이라면 꼭 긁어서 당신들이 알아야 해?  통통이의 자격지심이지만,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는 "긁어서 세상에 드러난 복권"이 되기위해 정말 갖은 노력을 했다. 피부과, 마사지샵은 물론이고 네일 관리에 PT, 식단까지 하면서 말이다. 복권을 긁기까지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이 드는 줄 몰랐다. 복권 긁다가 골로 갈 판이었다. 그렇게 나는 뼈 사이사이에 붙은 살을 온종일 긁어냈다. 내가 살을 긁는 동안 사람들은 내 팔을 만지며 마른 것 좀 봐, 감탄이 섞인 걱정을 던졌다.


 등이 훅 파인 튜브 실크 드레스를 입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축하보다는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네가 상체가 다 드러나는 튜브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몸이 되었구나.'

 하는 인정.


 결혼식이 끝나고 2주가 지날 무렵까지도 나는 다시 살이 찌기가 무서웠다. 어떻게 긁어낸 살인데 이걸 다시 원상복구 시키는 건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간 받아왔던 인정. 말랐다는 인정을 못받을 것이므로 나는 살찌기 싫었고, 밥을 일정량 이상 먹기가 힘들어졌다.


 현저하게 줄은 식사량 앞에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나는 곧장 20대때의 내가 떠오르면서 경보음을 켰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있어. 안돼. 복권은 커녕 아무 가망성도 없는 굴러다니는 종이 쪼가리 수준이었던 그때로 돌아가긴 싫었다. 다시 밥숟가락을 들었다.


 20살 그리고 20대. 나는 많은 가능성을 가진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 그때 내 복권에는 여러 칸이 있었다. 학업, 가족, 친구, 연애, 취향, 가치관 등 수 없이 많은 칸이 존재했다. 그런데 난 눈 먼 사람처럼 오로지 단 한 칸에만 집중했다. '외형' 흔히 얼굴과 몸매로 일컬어지는 그 칸을 긁고 또 긁었다. 꽝이 확실했는데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계속 긁고 또 긁었다.


 외형의 아름다움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 그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결핍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것만 얻으면, 그것에만 당첨되면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마치 많은 빚을 진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으며 매주 복권을 사는 것처럼, 나는 모든 문제를 제쳐두고 얼굴과 몸에만 신경을 쏟았다.


 우리는 우리의 결핍 때문에 복권을 산다. 그것만 당첨되면 나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권에 당첨되면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복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돈은 많을 지 언정 이 종잡을 수 없고 괘씸한 인생은 항상 그 상황에서 견디고, 해결해 나가야할 숙제를 내주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사회적 기준으로 따졌을 때 예쁘지 않았기 때문에 예뻐지고 싶었다. 예뻐지기만하면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물론 예뻐지면 인생살기 좀 더 편해졌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이미 바닥을 치고 지하 공사까지 마친 자존감이 예뻐진 내게 어떤 숙제를 내줄지, 그리고 그 숙제를 아름다움을 향해 편협한 마음을 가진 내가 잘 해결할 수 있을진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이미 긁어본 복권이라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꽝이라고! 아무리 삐쩍 말라도 지금 이게 최선이라고! 하지만 어느샌가 복권을 포기하고 세상이 내준 숙제를 열심히 풀어보니 복권에만 집중되어 있던 내 시야는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고, 그제야 세상은 내게 많은 행운을 주었다. 세상이 내어준 행운은 좁은 칸에 집중하는 손끝이 아니라 세상을 느끼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내게 '지혜'라는 형태로 조금씩 주어졌다.


 내 곁에 남아준 사람을 놓치지 않기, 끝까지 견뎌 성실의 힘을 알기, 자신을 돌볼 때를 알기 등 숙제를 근면하게 해결해낸 내게 삶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행운으로 보상해주었다. 생각해 보니 이 얼굴과 괴팍한 성격으로도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긁지 않은 복권이 아니라 아직 캐내지 않은 원석일지도 모른다. 땅 속 깊히 묻혀 돌인지 원석인지 구별도 못할정도로 형편없는 몰골이지만,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면 제 빛을 내는 보석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보석에는 시간과 세공 과정이 중요할 뿐, 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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