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배고픔과 충동 소비에 대하여
“나 강제로 채식했어."
휴가 동안 조부모님 댁에 먼저 다녀왔던 동생의 경고였다. 그리고 다음 타자였던 나는 채식을 떠나 며칠 만에 식사량이 완전히 줄었다. 새벽 5시 반에 아침, 11시 반에 점심, 5시 반에 저녁. 이때를 제외하고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면 먹을 대상이 필요한데, 정갈한 냉장고와 검소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주방에는 그날 먹을 만큼의 밥, 반찬만이 있을 뿐이었다.
간식이 필요하다면 이웃집 밭에서 얻어 오신 복숭아를 먹거나, 할아버지가 키우신 옥수수를 쪄서 먹으면 되었다. 먹을 만큼만 껍질을 까고, 쪄야 한다. 이 동네에선 음식물 처리가 도시만큼 편하지 않아서 되도록 음식을 남기지 않을 만큼만 준비하고, 먹어야 했다.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나는 나의 배꼽시계를 되찾았다. 그간 울릴 일이 없던 배꼽시계가 제 기능을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식이조절과 건강식을 하게 되면서 배속이 텅텅 비어있는 느낌과 공허하게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어쩐지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하루에 이정도면 충분하구나.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를 여는데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일과 각종 간식들, 식재료로 꽉 찬 냉장 냉동실, 항상 음료 칸을 차지하고 있는 맥주와 까까 창고가 되어버린 주방 찬장까지 분에 넘치게 차있는 우리 집 주방. 다 먹지도 못하고 잊게 될 거면서 나는 왜 이토록 사고 넣고, 또 사고 넣었을까. 배고프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도 먹었나.
도시 쥐가 된 나는 언제부터인가 '가짜 배고픔' 또는 '가짜 식욕'이라고 불리는 이것에 방어할 틈도 없이 당하고만 있다. 도대체 왜 나의 뇌는 이미 충분히 채워진 장기 속에 무언가를 더 채워야 한다는 거짓말을 했을까. 아마도 공허함 때문일 거다. 무언가에 대한 공허함을 배고픔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순간, 택배가 마를 일 없는 우리 집 현관 앞이 냉장고와 함께 겹쳐 보인다. 내 뇌가 속였던 건 위장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무의식이 쓸데없이 먹는 것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다른 일들도 많이 벌이고 있다.
'진짜 없음'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지? 가짜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헛헛한 느낌만으로 내가 물건을 구입하고 무언가를 갈구한 횟수는 얼마나 많을까. ‘우아한 가난의 시대’의 저자가 인용한 문구로 대신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키스페인은 사람들이 실제적 가난보다 가난하다는 느낌을 더욱 참을 수 없어하며 이 ‘느낌’이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성급하게 선택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한다.
말을 살짝 바꿔보면 나는 단지 ‘없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해서 진짜 필요보다 더 많은 양의 것을 먹고, 사 왔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정말 필요한 것인지, 필요한 느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습관처럼 쿠팡을 연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 날이 되면 기억도 하지 못하는 택배 상자(또는 봉투)가 출근하는 나를 맞이한다.
내가 결핍되었다고 느끼고, 갈망하는 대상은 진짜일까? 거짓일까? 어쩌면 내가 구분할 수 있으면서도 애써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려면 치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한다. 그만큼 에너지나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나는 귀찮은 거다. 치밀하게 고민할 바에 그냥 사거나 먹고 마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집 팬트리는 쓸데없는 물건으로 차고 넘치고 냉장고에는 먹지도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식자재가 남아있다. 분명 이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증표보다는 내가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내가 가짜에 속으면 속을수록 많은 것이 의미 없이 남아버렸다. 가짜 배고픔이나 가짜 필요는 해결하는 즉시 행복한 기분을 주었지만 정말 일순간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대체제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남고, 썩고, 쓸모가 없어졌다. 이런 모습은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가짜를 해결하면 뭔가 속은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고 오히려 더 공허하다.
때문에 나는 이제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잡다한 물건이 늘어진 집과 꾸준히 늘어나는 몸무게는 이미 경고를 했는데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다. 다시금 꼬르륵 소리가 나는 ‘진짜’ 허기에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진짜’ 필요한 물건을 얻었을 때 안도감을 되찾고 싶다. 그렇게 나를 채우고 싶다. 가짜 말고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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