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Jul 02. 2019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흰 스웨터와 김치찜이다.

흰 스웨터를 입고도 김치찜을 완벽하게 먹어내려고 했다.


#후회하는 일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생긴 아주 좋은 습관이 하나 있다. 거의 매일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내가 애용하는 다이어리에는 친절하게도, '그날 쓸 거리가 없다면 이건 어때요?'라는 식으로 질문이 하나씩 적혀있다. 그날, 다이어리에 쓰여있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



 나에게는 아끼는 흰색 앙고라 스웨터가 있다. 배꼽을 들어내지 않을 정도의 적당히 짧은 길이, 늘어나지 않게 도톰한 넥 라인에 태평양 같은 나의 어깨선을 감추어줄 어깨선이 없는 디자인까지. 정말 내가 사랑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옷이다.

이번 봄 벚꽃 놀이까지 함께 했다. 더워 죽을 뻔 했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흰색의 앙고라 스웨터’라는 것이다. 흰색, 앙고라, 스웨터. 정말이지 때가 타기 쉬운데 세탁하기 힘든 옷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다. 화장을 하고 나서 조금만 잘못해도 화장이 묻어난다. 몇 시간이 지나면 소매 끝의 색이 애매해진다. 특히나 그 옷을 입고 색이 진한 음식을 먹다가 튀면, 끝이다.


 덕분에 이번 겨울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우리 엄마의 김치찜과 이 흰색의 스웨터를 동시에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돼지 등갈비 김치찜’은 우리 한 여사님의 전매특허 요리로서, 한 여사님께서는 고기의 부드러움을 위해 그날 우리 집에 있는 과일이란 과일을 다 넣으시고 고기를 재우시며, 여사님의 그 날 기분에 따라 배율이 조금씩 달라지는 특제소스와 함께 적당히 졸이신다. 여기에 한 번 먹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마성의 울 할머니 김치까지. 아무튼, 굉장한 요리다.

한여사님표 밥상. 엄마 사랑해요

 주말에 집에 갈 것이라고 메세지를 보내면 항상 “뭐 먹고 싶은 것 있어?”라고 물으시는 엄마께 “그냥 집에 있는 거로 먹지 피곤하게 뭘 또 해.”라고 얘기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등갈비 김치찜”이라고 답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김치찜과 흰색의 스웨터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물론 김치찜을 먹는 날 그 옷을 안 입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 정도의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날은 그 스웨터를 입고 엄마의 김치찜을 먹게 된 날이었다.


모름지기 등갈비 김치찜은 발골 작업을 끝낸 후 통으로 들어가 있는 김치 한 장을 손으로 주욱 찢어 고기에 돌돌 만 후 한입에 우와앙 하고 먹어야 제맛인데, 이날은 도통 그럴 수가 없었다. 김치를 가위로 자르다니. 그것도 결의 반대 방향으로. 거기에 숟가락에 고기와 김치를 올려 우아하게 먹는 꼴이라니. 마음속으로는 눈물을 훔쳤다. 그날, 김치찜을 먹을 생각을 못 하고 흰 스웨터를 선택한 나를 후회했다.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하루는 사람들과 “후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후회하는 것. ‘인생 후회’는 무엇일까. 며칠을 고민해본 후 내린 결론은 ‘항상 잘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항상 잘하려고 했다. 그게 제일 후회된다.


나는 모든 일 앞에서 흰 스웨터를 입고 김치찜을 먹는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잘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란 것 앞에서 볼펜 똥보다 작은 존재가 기를 쓰니까 흰 스웨터를 입고 김치찜을 먹는 사람처럼, 손짓 한 번 잘못했다가 흠이라도 튈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먹음직한 묵은지를 앞에 두고 순백의 스웨터를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결국, 노심초사는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못 하는 일은 곧 무서운 일이 되었다. 어른들이 아플 게 뻔하니 하지 말라는 그 말을 너무나 잘 듣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굳이 손을 데어가며 뜨거운 것을 알아채는 이들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색이 진한 옷을 입은 날에도 김치찜을 앞에 두고 ‘이게 너무 짜서 고혈압으로 죽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살게 되었다. 흰색 스웨터에 김치찜. 이제 그것은 나의 걱정거리 축에도 끼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제 나는 새빨간 실수를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흰 스웨터든, 블라우스든, 순백의 옷을 입은 날에도 손으로 김치를 주욱주욱 찢어가며 소매에 튄 김칫국물을 무시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누가 옷에 무엇이 묻었다고 일러주거든,

“ 아, 제가 오늘 김치찜을 먹었거든요.”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