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어설프게 곱씹기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종 전체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유기체들이라 정의한다.
흔히들 '이타적' 행위로 생각하는 봉사, 희생, 협력, 심지어는 모성애조차도 이기적인 행위이다.
유전자 단위로 고찰해보았을 때, 그것은 본인의 유전 형질을 후대로 존속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 앞에서, 몇몇 회의주의자들은 이기적으로 코딩된 인간들의 사회에서
진정한 자기희생과 봉사는 이뤄질 수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 이기적인 행위들이 결국엔 가장 이타적인 행위라는 관점 말이다.
개인의 필요로 인한 소비가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개인의 필요로 인한 결혼과 육아가 국력을 향상하고,
개인의 필요로 인한 저작 활동이 타인의 지적 저변을 넓혀준다.
나는 나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정의한다.
정확히 말하면 문유석 판사가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정의한
'유아적 이기주의가 아닌, 성숙한 개인으로서의 개인주의'를 표방한다.
나는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 삶을 살고, 내가 재밌어서 남을 도와주고, 내가 뿌듯해서 기부를 한다.
또한 나를 위해 공부하며 나를 위해 마케팅을 한다.
나의 '이기적인 활동'들이 사회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까? 명확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하겠다.
내 도움을 받은 몇몇 친구들은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들을 물질세계로 구현했고,
나와 결연을 맺은 아동은 기부금으로 생계비와 학습비를 대고 있다.
또, 내가 마케팅을 함으로써 광고주들은 수백 명의 고객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단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했을 뿐인데, 그로 인한 수혜는 다수가 받는다.
이것이 이기주의가 불러오는 이타적인 효용이다.
칸트는 자신의 물질적, 감정적 이익이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로 보았지만,
부족한 내가 봤을 때 그러한 행위는 이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도덕적 행위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와는 많이 다르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본인의 이익을 배제한 활동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설계되었고, 사회 문화적인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위해 살아야 한다.
철저하게 스스로를 위해 마케팅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삶이 나뿐만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위해 살고, 또 나를 위해 마케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