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교환이 다 대화는 아니다
사람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명확한 기준 중에 하나는 대화이다. 본능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 추상적이고 복잡한 개념까지 다룰 수 있는 대화가 가능해야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직립보행이나 도구의 사용, 더 나아가 염기서열 등 직관적인 생물학적 특성보다 대화의 가능 여부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뚜렷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단순히 생각을 언어로 치환하여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행위는 대화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의사소통의 범주에는 속할 수 있겠지만, 대화는 엄연히 더 복잡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단순 의견의 교류에서는 주장과 논거만 뚜렷하다면야 그 외에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의견을 너머 감정과 정서를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더 심화적인 조건들이 필요하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일단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언어란 본능적으로 각인된 울음소리와 제스처로 표현이 불가능한 복잡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차선책에 불과하다. 보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느끼는 개념들이 어휘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정서와 이해력을 모두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포용되지 못하는 특수한 개인의 사고들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만약 인간의 사고를 왜곡 없이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된다면 언어는 곧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우리는 남은 생의 상당한 시간을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하며 타인과 소통하며 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완전한 도구를 다루기 전에 유념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대부분이 쉽게 잊어버리는 진리가 있다. 우리는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인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나 이런 거 좋아하네'라는 문장이 유행할까. 일상을 살면서 예상치 못한 요소들에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스스로한테도 깜짝깜짝 놀라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상대방을 다 알고 있다는 유아적 전능 감에 젖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그러한 우를 꽤나 자주 겪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와 가치관이 보편적이라 믿는 특성이 있다(그 역도 대개 성립한다.) 때문에 타인도 특정 상황에서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인간에게 자기 객관화는 굉장히 어려운 분야이기에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상대방에게 자신의 사고관을 강요하는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잦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상대방은 절대 우리와 같을 수 없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가 그 어휘에 담은 사고의 본질은 우리가 그 어휘에 부여한 의미와는 또 다른 형태의 것일 수 있음을. 언어는 결국 도구에 불과하기에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누구인지에 따라 똑같은 어휘와 문장도 수십 명의 사람이 사용할 때 각각이 수십 개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