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구에게 만년필을 한 자루 받았다. 몽블랑처럼 비싼 건 아니고, 중저가 브랜드 만년필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필기구 모으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상하게 만년필 쪽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마 만년필만의 독특한 관리 및 세척 방법과 카트리지, 컨버터 두 개를 갈아끼며 사용하는 방식이 일반 볼펜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불필요한 귀찮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사실 위에 사항들보다는 1만원이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필기구가 아닌 사치품에 불과하다는 소비관념 때문에 만년필을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원 대 제트스트림, 시그노, 하이테크 볼펜만 사용하더라도 노트 필기나 다이어리 작성 시 팔에 미세한 전율이 돋는 쾌감을 느낄 수가 있다. 난 필기구로부터 얻는 쾌감은 딱 이 정도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내게 선물한 만년필은 몸통이 배나무로 되어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금속이나 플라스틱 몸통을 가진 만년필들과는 조금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금속재질의 뚜껑과 배나무 색의 대비는 상당히 마음에 들기 때문에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더 얹을 말이 없다. 그러나 필기구가 아무리 겉모습이 예쁘면 뭐하나. 필기구는 잘 써지고, 필기감 좋고, 내구성이 좋은 것이 최고이지 않는가?
다이어리를 펼쳐 만년필로 글을 써보았다. 아 참고로 만년필의 경우 펜촉의 방향에 따라 글씨가 얇게, 두껍게, 혹은 아예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반대 방향으로 썼다가 잉크가 나오지 않아 당황했기 때문에 알려주는 초보자용 팁이다. 하여튼 펜을 바로 잡고 글을 쓰는데 필기감이 볼펜의 그것과는 아예 다른 원리로 글이 싸졌다. 볼펜은 펜촉 끝에 쇠구슬이 달려 있어 그것이 돌아가면서 잉크를 종이에 묻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좋은 필기감은 이 쇠구슬이 얼마나 부드럽게 굴러가느냐에 달려 있지만 만년필은 구조가 아예 달라서 볼펜과 평가 기준이 아예 다르다. 만년필은 잉크 저장소(카트리지)와 펜촉 사이에 쇠구슬 같은 요소가 아예 없다. 대신 가느다란 관으로 이어져서 잉크를 직접 종이에 묻히는 방식이다. 혹자는 만년필의 이러한 필기 방식 때문에 그 끝이 빨리 닳지 않겠느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만년필의 펜촉에는 마모에 강한 합금이 사용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괜히 이름이 '만년필'이 아니다.
이 특유의 필기방식 때문에 볼펜으로 글을 쓸 때와는 다르게 펜촉이 종이를 부드럽게 긁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필기음의 시그니쳐 사운드가 되어 현재는 스마트폰이나 PC에 필기 입력을 할 시에 효과음으로도 사용된다. 단순히 금속이 종이를 긁는 소리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적 상징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요즘 새벽에 일기를 쓸 때 볼펜이 아닌 만년필을 애용하는 편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 내 방을 채우는 소리가 오직 만년필의 필기음만 존재할 때의 기분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펜과 만년필의 특성을 나누고 보니, 마치 이성과 감성으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갤럭시와 아이폰을 비교하는 기분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편리한 볼펜, 조금은 불편하고 까다롭지만 단순 사용이 아닌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만년필은 각각에 대응되는 스마트폰과 너무나 닮아있다.
사실 경제적 합리성과 글을 쓰는 그 자체의 효율만 놓고 보자면 난 단연 볼펜의 압승이라고 생각한다. 천원 단위의 제품들 중에서도 일본산을 필두로 꽤 괜찮은 필기감을 보여주는 제품들이 많이 있으며, 가격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체감되는 필기감의 향상도 크게 느껴진다. 반면에 만년필은 몇 만원짜리 만년필과 몇 십만원짜리 만년필 간의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1000원짜리 볼펜과 10000원짜리 볼펜의 비교에선 필기감이나 마감의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비된다.
잉크나 카트리지 등 부자재의 존재로 인한 관리의 어려움과, 동시에 가격도 비싼 만년필을 도대체 왜 사는가라는 의혹을 품었다면, 사람들의 소비에서 합리를 찾으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시도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본인이 안먹고 안써가면서 모은 돈을 명품 시계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룸살면서도 차는 벤츠를 타는 카푸어들도 흔하다. 사람은 애초에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성과 감성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는 감성의 몫이다. 비유하자면, 감성이라는 코끼리 위에 올라탄 인간 기수를 떠올릴 수 있다. 기수가 코끼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코끼리가 한 번 흥분하면 기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성이라는 기수가 가격과 편리함을 생각했을 때 역시 볼펜을 사는 것이 이득이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봤자, 감성이라는 코끼리가 만년필에 꽂혀버리면 기수는 그저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볼펜이 더 편한데도 난 오늘도 다이어리를 작성할 때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더 가볍고, 더 잘써지고, 잉크도 안 마르는 일본제 필기구들이 필통에 꽉 차있는데도 나는 파버카스텔 만년필의 뚜껑을 연 것이다. 오늘도 내 머릿속에서 무력한 기수는 날뛰는 코끼리 위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줄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