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학 = 쓰 레 기
철학은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인가?
재수학원을 다닐 때였다. 모든 소통의 창구를 차단당한 채 12년간 배우던 것을 1년이나 더 배우는 불행에 처한 학생들에게 수업 중간중간 수업과는 관계없는 딴소리는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와 같았다. 우리 학원에는 정식 과목은 아니지만 논술을 강의하던 강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깡마른 체격에 볼과 눈이 움푹 파여 약간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였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오후 2시쯤이었고, 아이들이 한참 졸음과 싸움을 할 때라 강사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딴소리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본인이 살아온 일생을 간단하게 풀어주셨는데, 어렸을 때 그는 목포에서 소문난 수재였단다. 그 세대 인문계 수재들이 으레 그랬듯이 주변 사람들은 그도 서울대 법학과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춘기가 세게 와서 항상 시니컬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그 시절 강사님은 삶의 이치를 알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주변의 당연한 기대에 반항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하셨고, 고교 내내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그였기에 별 탈 없이 합격하였다고 한다. 입학 후 그는 기대와는 다른 학교생활에 철학과에 온 것을 후회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보화 시대의 시작에 '고리타분한' 철학과를 전공한 강사님은 별 볼 일 없는 사교육쪽을 전전하게되었다.
그분은 원래 주름진 미간에 더욱 힘을 주면서 본인보다 공부 못하던 친구들이 판검사가 되고, 사업가가 되어 사회에서 한자리 턱! 차지한 것을 볼 때마다 배알이 꼴려 죽겠다는 듯 얘기했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다른 강사들의 엔딩 레퍼토리와 똑같이 '그러니 너희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과에 가야 한다.'였다. 뻔한 마무리였다.
이어서 학생들이 질문했다. "선생님, 철학과에 가면 무엇을 배우나요?"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흰색 분필을 들고 초록색 칠판에 '철 학'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판서했다. 그리고는 오른쪽에 등호를 그리더니 가는 팔을 휙휙 저어가며 대문짝만 하게 '쓰레기'라고 적었다. 아- 가히 충격적이었다. 검푸른 칠판 위를 가득 "철 학 = 쓰레 기"라는 공식이 메꾸었다. 플라톤, 루소, 로크 등의 철학자들을 교과서에 나와있는 짧은 지문들로만 보아온 철학 문외한인 나였지만서도 철학이라는 단어에는 굉장히 고상하고 심오한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철학을 직접 전공한,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강사님이 그 단어에 쓰레기를 퍼붓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다니!
강사님은 본인이 판서한 공식이 흡족한 듯 몇 초 간 바라보더니 깊은 호흡을 한 번 내쉬고는 우리를 향해 말 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때는 철학이 모든 학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고. 그렇기에 텔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이자,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이자, 생물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천문학자이자, 정치인이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각 분야의 학문이 독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수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신학, 의학,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문학 등 수많은 학문들이 민들레 홀씨 흩어지듯 철학이라는 본체를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앙상한 철학 줄기에 붙어 있던 심리학의 홀씨마저도 프로이트의 등장 이후 바람에 날려 보내어 지금의 철학은 모든 씨앗을 흘려보낸, 썩어 없어질 단계만 남은 쓰레기라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생각은 꽤 오랜 시간 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내 생각에도 "철학=쓰레기"라는 공식이 야금야금 뇌의 영역을 차지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얘기 중에 철학이 나오면 나는 15년 여름 재수학원 강의실에서 열변을 토하던 논술 강사님에 빙의되어 우리가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우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역시 나만의 철학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남이 주입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그 강사님의 말 대로 철학은 정말 쓰레기일까? 지금에 와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쓰레기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학문의 모체 역할을 하는 인류 지성의 근본적인 틀이 바로 철학이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인문고전 서적들에 담겨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지금의 최첨단 과학기술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계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천재들은 모두 인문고전을 탐독하고 철학적 사고에 통달한 자들이었다. 과학계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체제 또한 소크라테스 이후로 이어지는 서양 고전철학에 매진했던 위대한 사상가들로부터 발명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아담 스미스, 홉스, 로크, 칼 마르크스 등이 그러하다. 이들이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어져 오던 철학의 계보를 뒤로 하고 '실용적인 것', '당장 돈이 되는 것'만 매진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폭력과 야만의 세계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철학적 의제를 논하고자 하는 관성을 끊지 않고, 대를 이어 발전시켜온 철학자들 덕분에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정치체계, 경제체제가 이토록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던 것이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도덕, 법, 인륜 등은 인류 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 아니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토론하던 천재 철학자들이 후대에 지성을 전파하고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단어 그대로 '피와 땀'을 흘려가며 이룩해놓은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인류가 철학을 통해 이뤄놓은 것은 인문고전 몇 권이 다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만약 함수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어떠했을까? 아마 마우스부터 GPS까지 현대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기기들이 등장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가 여기까지 도달하면 천장에 붙은 파리의 위치를 보고 함수를 떠올린 데카르트에 대한 감사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전에 데카르트가 사색할 문제들과 사고하는 방식을 정립해놓은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데카르트는 함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없었다면 데카르트의 말마따나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인간 데카르트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함수뿐이랴. 만유인력부터 상대성이론까지 과학기술의 근본이 되는 물리학은 (물리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철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대표적인 학문이다. 뉴턴은 고전 물리학의 정수인 자신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대 사람들도 자연현상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학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현대 사람들은 형식과 주술적인 요소를 거부하여서 자연현상을 수학 법칙으로 나타내게 되었는데 나는 이 책에서 수학을 발전시켜 철학에 이르도록 하였다” 뉴턴은 수학을 또 다른 형태의 철학으로 간주한 것이다. 알파벳을 쓰느냐, 수학 기호를 쓰느냐에 따라 철학, 물리학으로 딱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리적 힘을 다루는 철학이 '물리학'인 것이고, 그 물리학의 중심 사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언어가 수학인 것이다. 즉,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성이 인간 주변을 둘러싼 물리 세계를 향한 또 다른 철학이다.
이 외에도 모든 학문의 뿌리에는 학문의 목적성이라고 하는 철학적 사유가 숨겨져 있다. 인류의 모든 행위는 그 목적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나 수천 년 간 연구가 이루어지는 학문의 경우는 그 목적이 더욱 뚜렷하다. 바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 진리탐구의 욕망은 철학자들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욕망이다.
인류가 물고기 잡고 사냥하던 수렵 채집기 시절부터 있던 본능이 아니라, 고대 지성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의 삶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 방법을 모색하다가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 '진리'이고 그것을 탐구하려는 욕망에 수천 년 간 가치를 부여한 것도 철학자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전체가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머리를 싸매고 인간다운 삶을 고민한 결과물인 것이다. 철학자들이 설계한 사회에서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 존엄하게 살고 있는 당사자들이 철학을 쓰레기라 매도하는 상황은 얼마나 우스운가.
사과를 개량해서 더 맛 좋고 수확량 많은 사과를 만들려면 당연히 사과나무를 연구해야 한다. 백날 사과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좋은 품종의 사과가 개발되지는 않는다. 철학도 이와 같다. 철학이라는 튼튼한 나무에서 물리학, 수학, 경제학, 심리학 등의 과실들이 맺어진 것이지 과실이 먼저 있고 나무가 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달달한 과실 맛만 보겠다고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홀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다. 나무를 연구해야 더 좋은 과실을 맺게 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해야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