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얽힌 계급 간의 투쟁과 조화
2005년 해외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지성이 유럽 최강의 축구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했다. 현재 20대 중반 이상의 해외축구팬들은 대부분이 이때 해외축구에 입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버지’ 박지성이 영국 축구판에서 한국 축구선수들의 활로를 열며 토트넘의 이영표, 볼튼의 이청용, 스완지의 기성용 등 유수의 한국 축구스타들이 연이어 영국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2015년 한국이 낳은 최고의 축구스타 손흥민 또한 영국 무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제 EPL은 소수의 팬들이 즐기는 리그가 아니라, 남녀노소 전 국민이 즐겨보는 최고의 리그가 되었다. 인기가 붙으면 언제나 깊이 파고드는 소위 ‘오타쿠’들이 생기는 법. EPL을 깊이 탐구하다 보면 각 팀들의 탄생 배경과 라이벌 구도 등을 알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계층마다 응원하는 팀이 다르다는 점이다. 아니, 전 지구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지가 한참인데 선진국인 영국에서 계층이라니?
영국은 놀랍게도 엄연히 계급사회(The British class system)이다. 왕족과 귀족이 현대에도 번듯하게 존재하며, 계층은 후대로 계승되거나 영국 왕이 직접 직위를 수여하기도 한다. 계층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상류층(Upper class), 중산층(Middle class), 노동계급(Working class)으로 명명됐다. 이 안에서 다시 세부적인 계급으로 또 나누어진다. 이는 우리나라처럼 단지 소득에 의해서 나누어진 편의 목적의 구분이 아니다. 사회 보편적으로 이러한 계층의 존재를 모두가 인식하며, 계층 간의 영어 발음도 다르고, 영국 공영방송인 BBC에서 계급 측정기까지 제공하고 있다. 영화 ‘빌리 엘리엇’나 ‘킹스맨’에서는 노동자 계층의 주인공을 소재로 삼기도 한다.
이들 세 계층은 각각 소득 수준이 첨예하게 다른 만큼 서로 즐기는 문화양식도 너무나 다르다. 즐기는 음악, 입는 패션 브랜드, 먹는 음식도 계층별로 나누어져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스포츠도 계층별로 다른 종목들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상류층은 전통적으로 부유함의 상징인 폴로와 승마, 골프, 테니스 등을 즐긴다. 중산층은 스쿼시와 럭비를 즐긴다. 계층이 하락할수록 점점 돈이 덜 드는 스포츠로 변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노동자 계층까지 가면 몸과 공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어떤 스포츠를 즐기는가에 따라서 계층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정말 계층 나누기를 좋아하나 보다. 축구라는 하나의 스포츠 안에서도 또 계층별로 응원하는 팀이 나누어지니까 말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기는 하다. 전통적으로 공업도시이거나 도심의 외곽을 연고지로 하는 팀에는 연고지를 고향으로 하는 노동자들이 팬으로 몰리는 것이 당연하고, 도심이나 엘리트들이 모여 사는 곳을 연고지로 하는 팀에는 상류층 및 중산층이 팬으로 몰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26부까지 있는 영국의 축구리그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팀 몇 개를 뽑아보면 맨유, 첼시, 아스날, 리버풀 등이 있는데, 이 들도 팀의 재력이나 순위와는 상관없이 연고지에 따라 계층이 다르다. 전통적인 공업도시인 맨체스터는 예로부터 노동자들이 많기로 유명했고, 리버풀의 연고지인 머지사이드는 쇠락한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노동계층이다. 아스날은 북런던을 연고로 하고 있는데, 북런던은 런던 중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첼시의 연고지는 서런던이며, 런던에서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첼시와 같은 서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대표적인 팀으로는 풀럼 FC가 있다.
리그에서는 치고받고 서로 비등비등한 듯이 보이지만, 각 팀의 응원객들은 명백하게 계층이 구분되어 상하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EPL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축구리그에서 계층별로 응원하는 팀이 다른 경우는 많다. 심지어는 같은 연고지의 다른 계층팀 간의 더비 매치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밀란과 인테르의 더비 매치를 들 수 있겠다. 두 팀의 연고지는 똑같이 밀라노이며, 홈 경기장도 ‘산 시로’로 같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의 응원팀인 AC밀란과 노동자 계층의 인테르는 서로 앙숙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쯤 읽었으면 누군가는 이러한 ‘급 나누기’에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열정과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스포츠 세계인 줄 알았건만 그 내면에는 서로 구분 짓고 누가 더 위에 있는지를 따지는 계급 사회의 모습이 숨어있으니 말이다. 부유한 연고지를 둔 첼시와 가난한 연고지를 둔 아스날이 런던 더비를 벌이는 날에는 아스날 관중석을 측은하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는 자기보다 위에 계층에 속한 사람을 이길 수가 없으나,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부유한 사람들이 응원하는 팀을 이길 수는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첼시를 종종 큰 점수 차이로 이겨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가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은 EPL 20/21 시즌 24라운드이다. 맨시티와 맨유, 리버풀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데 반해 첼시는 4위권에 들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으며, 풀럼은 강등권을 허우적 대고 있다.
노동자 도시를 연고지로 삼는 팀들이 다른 부유한 연고지의 팀들을 깨부수고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연고지 사람들을 패배의식에서 꺼내어 자부심을 고취시켜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선수 보비 찰튼이 영국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동일 팀의 전설적인 감독인 퍼거슨이 뒤를 이어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 모습을 본 팬들은 마치 본인들이 기사가 된 양 기뻐했다.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통해 현실세계의 고단함을 잊고 나아가 위로받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것을 뛰어넘어 그들의 실제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계적인 클럽이 된 맨유, 맨시티, 아스날, 리버풀 등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음으로 인해 실제 연고지의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축구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 계층의 벽을 뛰어넘어 그들의 실제 삶도 살찌워주고 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축구 관련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아마도 ‘공은 둥글다’ 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정말 촘촘하게 나누어져 있는 영국 축구계의 계층도를 보면 공이 둥글기는커녕 주사위처럼 정육면체가 아닐까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공은 아주 잘~굴러가고 있는 듯 보인다. 축구장 안에서 만큼은 노동자도, 중산층도, 상류층도 없다. 이기는 팀과 지는 팀이 있을 뿐이고, 이기는 팀의 응원객들이 노동자여도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고, 지는 팀의 응원객들이 상류층이더라도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할 것이다. 그라운드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들의 계층을 나누는 것은 돈도, 가문도, 직업도 아닌 골 망을 흔드는 공의 개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