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은 책에 있다
회사에서 진상을 처리하고, 씩씩거리며 퇴근했던 날이었습니다. 분한 마음을 야식으로 식혀보지만, 도무지 가라앉지 않더군요. 진상이 “제가 고작 이런 콘텐츠나 받으려고 큰돈 드린 줄 아세요?”라는 말이 맴돌아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책을 하나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가 펼쳤지요. 하필 밑줄 그어진 문장이 이것이었습니다.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
저는 나지막이 말하고 잠들었습니다.
“씨발 새끼...”
이게 당신이 등장하는 <시선으로부터>를 재독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고민에 어떤 말을 해줄 어른이 필요할 때마다, 당신을 찾았습니다. 고민을 말하고, 아무 페이지를 펼쳐 해답의 문장을 발견하는 <고민해답책>처럼 말이지요.
제사를 절대 지내지 말라는 당신의 유언과는 달리, 자손들은 하와이에서 딱 한 번의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며 당신을 추억할만한 것을 구해와 제사상에 올리는 방식으로 말이죠. 첫째 딸 명혜는 훌라춤을 배우고, 손녀인 화수는 팬케이크 트럭을 직접 끌고와 제사상에 올리지요. 이런 자손들의 하와이 이야기에는 당신의 말들이 먼저 붙습니다. 당신이 생전에 각종 인터뷰와 칼럼, 교양 프로그램, 강연 등에서 했던 말들입니다. 말들은 주로 자손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데, 그 자손에 제가 포함되는 것처럼 당신의 말을 오래도록 읊조리게 되는 문장이 많습니다.
글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글쓰기로 먹고산다는 건, 어쩌면 복권에 당첨된다는 말과 일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진력을 잃은 글쓰기는 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글들의 연속이었지요. 그렇다고 그만둘 자신도 없었습니다. 제 삶을 돌이켜보면, 뻗어나가는 형태는 달라도, 큰 줄기는 글쓰기였습니다. 글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못하는 저는 스스로 단두대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작은 공모전에 참가해보기로 한 거죠. 이 공모전에서 떨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글쓰기와 이별하리라. 결과는 당연히 예선 근처도 가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결과가 발표되던 날에도 어김없이 <시선으로부터>으로 꺼내 들었습니다. 당신에게 어떤 말이든 듣고 싶었습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당신은 이런 식으로 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많이 건넸습니다. 당신의 첫째 딸 명혜는 당신을 그렇게 기억하더군요. 세속적인 기준으로 딸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자손을 비난하는 기준은 오로지 ‘자립과 독립’입니다. 덕분에 당신의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흔들리되, 누구에게 의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과거에 당신이 유명화가 ‘마우티마우스’와의 동거에서 자립하지 못한 여성이 남성과 살면, 세상이 어떻게 포악스러워지는지를 몸소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당신과 마우티마우스와의 동거를 떠올리면 기시감이 듭니다. ‘에드워드 호퍼’와 똑 닮았습니다. 과거 예술계에서는 부부가 화가일 경우, 아내가 남편의 예술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작품 모델이 되었다가, 밥을 해주고, 때로는 화풀이 대상이 되어 쏟아지는 주먹을 참아내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오는 예술의 기회를 모조리 남편이 뺏어버렸지요. 그런 남편을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에드워드 호퍼’입니다. 당신의 마우티마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우티마우스로부터 도망친 당신은 자립은 하되, 사랑을 배제하진 않습니다. 심지어, 두 번의 결혼을 하게 되지요. 첫 번째 남편인 요제프리가 향수병으로 한국을 떠날 때도 당신은 덤덤합니다. 자립이 주는 힘이겠지요. 오랫동안 자립과 사랑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심됩니다. 막상 혼자 있는다고 생각하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날 때면, 좋은 어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무자비한 간섭과 잔소리를 조언으로 착각하는 어른이 많습니다. 자신의 시대와 우리 시대를 동일시하며, 우리를 밟아 자신을 치켜올리기 바쁜 어른도 있습니다. 가끔은 친한 동생들이 저에게 조언을 구하는 눈빛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가장 경계합니다. 흔한 어른은 되기 싫습니다. 그럴 때면, 당신의 이야기를 권합니다. 저에게 좋은 어른은 책에 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