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그 사이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각자의 영역이 확실했다. 눈물겨운 서울과 대구 장거리 만남을 지나 직장인과 임용 고시생의 연애를 4년 넘도록 통과하고 있다. 덕분에 6년 동안 악명높은 권태기 한번 겪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권태기는 자주 만나는 커플만의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우리는 얼굴 보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했기 때문에 늘 애틋했다. 부족한 건,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준식이는 용돈으로, 나는 한 달 겨우 입에 풀칠하고 남는 돈으로 데이트했다. 나는 집밥을 자주 하다 보니, 요리 천재가 되었다. 준식이는 왕복 교통비 2,500원을 벌기 위해 앱테크를 열심히 했다.
4주년을 앞둔 어느 날, 준식이가 오랜만에 삼겹살집을 가자며 나섰다. 돈이 널렸냐며 버럭버럭하면서도 삼겹살집의 고기 냄새를 걱정하며 옷을 골랐다. 동네의 모든 고깃집을 기웃거리며 메뉴판을 훔쳐봤다. 1인분에 몇 그램이고, 그램 당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기를 두들겼다. 오랜 배회 끝에 가장 합리적인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집 데이트를 즐긴 사이에 물가가 많이 올랐는지, 1인분 같은 3인분의 삼겹살이 나왔다. 추가 주문할 수 없는 주머니 사정을 알기에 서로의 눈치를 봤다.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불판에는 고기가 몇 점 남았다. 서로 겉절이와 반찬만 먹으며 삼겹살을 양보한 것이다. 준식이는 식당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는 삼겹살집에 간 게 아니라, 백반집에 갔는데 반찬으로 삼겹살이 나온 거야.”
가난한 연애에는 현실을 웃어넘길 수 있는 유머가 필요하다.
우리 사이에는 가난에 대한 전우애만큼이나 오랫동안 쌓아 올린 암묵적인 규칙들이 있었다. 무언가를 받았을 때, 정중히 고개 숙여서 고마운 마음 표현하기. 내가 사면, 다음에는 네가 사기. 화났을 땐, 표준어로 카톡 하기 등등. 수많은 규칙 중 내가 먼저 깨부순 건, ‘상대방의 핸드폰 훔쳐보지 않기’였다. 우리는 하루에 딱 한 번의 전화로 연락을 퉁 치는 지경에 올랐다. 집과 도서관이 일상의 전부인 준식이에게 물을 안부도 없었다. 나 또한 특별한 일이 늘 생기지 않는 그저 그런 직장인이었으므로 우린 무소식이 희소식인 사이였다. 하루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준식이는 정말 연락 없는 시간 동안 공부만 할까?’
자취방에서 준식이가 어김없이 나보다 먼저 잠든 날이었다. 그는 한번 잤다 하면 절대 깨는 법이 없다. 야행성인 나는 준식이의 코골이를 배경 음악 삼아, 책을 읽다가 누웠다. 내 충전기에 꽂힌 준식이의 핸드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내가 궁금한 거 알아. 열어봐도 좋아.”
우리의 규칙을 깰 수 없다는 마음과는 달리, 이미 손은 핸드폰 잠금화면을 풀고 있었다.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면서도 한쪽 시야로는 준식이를 의식했다. 혹여나 깼다가는 현장을 들키는 민망한 상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은 아주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카카오톡부터 사진 앨범까지 빠르게 스캔했다. 요즘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찝찝한 기운의 정체가 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준식이는 전화번호를 저장할 때, 소속을 꼭 앞에 붙인다. 학교 동기면 15학번 체육학과 김민수, 가족이면 우리 가족 인식이 형 이런 식으로. 수많은 카톡 채팅방에서 소속 없는 이름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떨리는 손으로 채팅방을 눌렀다.
‘고생하셨습니다. 준식이 형. 다음 주에도 뵐게요.’
‘그래. 오늘 서브 멋있었다. 다음 주에도 보자.’
준식이는 그동안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운동 ‘배구’도 했다. 그것도 열심히, 자주 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배구를 향한 그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몹시 약소하다. 미쳤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밤새 열이 펄펄 끓어도, 배구가 만병통치약이라며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동호회에 나갈 정도였다. 준식이의 취미를 존중하지만, 다섯 번째 임용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는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걸린 이 시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준식이의 시험 결과를 전할 때마다 받던 동정의 눈빛이 떠올랐다. 엄마가 준식이의 임용 결과를 물을 때면, 내가 시험을 친 것처럼 위축되었다. 준식이가 1년만 더 시험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을 때, 배구를 포기할 각오가 되었는지 물었다.
“미쳤어? 시간 아깝지. 절대 안 나가.”
핸드폰을 덮었다. 옆에서 콧구멍이 너덜거리도록 코 고는 준식이를 쏘아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걸 말하는 게 좋을지,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 오래 고민했다. 말한다면 내가 우리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핸드폰을 몰래 봤다는 걸 말해야 했다. 연인들 사이에서 서로의 핸드폰을 보는 행위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라 말 꺼내기가 더 힘들었다. 각자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다. 나는 준식이에게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광고주에게 욕먹거나, 비굴하게 해명하는 건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다. 준식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훔쳐보고 싶은 욕심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다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준식이 핸드폰을 열었다. 잠금 패턴도 일직선만 쓸 만큼 단순한 그에게 조바심 때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건 아닐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메모장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별다른 잠금도 걸어두지 않은 채로 온갖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장도 있었다. 우리가 4년 전, 강원도 여행 갈 때의 체크리스트을 넘기고 마지막 메모장에 다다랐다. ‘합격하면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이었다.
- 아은이와 삼겹살 맛집 투어하기
- 아은이와 해외여행 가기
- 아은이와 커플링 하기
- 아은이와 인터불고 가기
- 아은이와 단풍 보러 가기
- 아은이 집에 인사하러 가기…
내 이름이 덕지덕지 붙은 메모장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핸드폰을 다시 덮었다. 자리에 누워 이불을 준식이에게 당겨주었다.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래. 네놈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은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