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공동체, 그리고 좋은 책을 발견하는 드문 기쁨에 관하여
382쪽,
책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인류의 다이내믹한 인공물이자 우리 개개인의 인생 여정에서 급회전을 한 지점을 표시해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개개인마다 그 이정표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의 인생을 바꾼 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긋지긋한 영어 수업 과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 누구에게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결정할 수 없다. 타이밍과 읽는 이의 성향과 책, 이 세 가지의 마법 같은 연금술로 결정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의 TOP 10 목록 한 부분이 채워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히 도서관에 꽂힌 책 중 면접 보기 전 읽어보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기도 했고...
내가 이 책을 맘에 들어했던 이유는, 처음 책의 몇 장을 읽었을 때 문학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작가의 문체가 문학적이란 말이 아니라 그냥 글의 흐름이나 주제가 현실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번역가가 번역을 너무 잘해놨다. 글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번역체 같은 말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직전 골라 들었던 책의 번역이 워낙 심술궂어서 번역의 고마움을 배로 느끼게 해 준 것도 없진 않다.
나는 여유가 된다면, 그리고 좀 더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조금 더 책을 지금보다도 더 좋아하게 된다면 언젠가 작은 차 테이블이 몇 개 구비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싶었다. 책의 작가인 웬디 웰치는 버지니아 주 와이즈 카운티에 자리한 작은 마을 빅스톤 갭에 작은 책방을 스코틀랜드 출신의 남편과 운영하는데, 나에게 책방 운영의 현실을 알려준 동시에 낭만을 같이 던져주었다. 골치 아프다.
그래서 이제는 작은 책방을 꿈꾸는 내 꿈에 대해 희망 -100, 용기 -1000, 욕망 +1000이 되었다.
144쪽,
자기네 지역에서 나는 것이라면 능력이건 품질이건 무조건 의심받고 마는 한계성에 타지인에 대한 적잖은 경계심까지 더해진 상황은 웬만해서는 헤쳐 나아가기 힘든 지뢰밭이다. 빈정대기와 눈치주기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내부인과 외지인들 간의 관계 - 그리고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지인이냐 하는 문제 - 는 집에서 만든 퀼트처럼 알쏭달쏭하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좋은 의도로 마을로 들어와 한번 잘해보려는 외지인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웬디 웰치는 서점 하나 없는 작은 마을, 젊은이들은 꿈을 품고 더 큰 마을로 나가는 버려진 탄광 마을에서 현실을 맞닥뜨린다. 언제고 성공한 다음 훌쩍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외지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자기 마을 자체를 스스로 평가 절하해서 외지인 조차 희망을 꺾이게 만드는 절망적인 뿌리 깊은 마을 주민들의 생각이 바로 커다란 벽이었다. 한국도 흔히 젊은이들이 귀농의 낭만적인 꿈을 안고 시골 작은 마을로 가면 그곳에서 나고자란 촌사람의 경계심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고 한다. 일단 외부인들은 원래 있던 사람들로부터 경계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현지인들은 수십 년 동안 마음을 주면 떠나버리는 외지인들로부터 몸소 배워 그를 방어하고자 벽을 치게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이해되면서도 슬프다.
웬디 웰치 또한 이러한 현지인들의 경계심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책에 잘 담아내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왕따를 당한 작가와, 그것을 이겨낼 각오로 만만치 않게 대응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나였다면 '바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며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았을까'하고 작가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작가가 현지인들의 경계심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나 또한 작가에 이입하여 현지인들을 욕하기만 했는데 작가의 지인이 한 말이 단 번에 마음에 와 닿은 동시에 어떠한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경계심도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거야. 그 대상이 딱히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말이야. 애인한테 차인 사람하고 데이트 안 해봤어? 말하자면 이 마을 자체가 그 '버림받은 애인'이라고 보면 돼."
이 책은 에세이다. 그리고 책이 현지에서 유명한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많은 기사 내용을 접할 수 있다. 나는 단순하게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에피소드에서 실제 모습이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작가 부부의 모습이 사뭇 달라 멈칫하기도 했지만 책에서 묘사한 부분 부분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게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159쪽,
잭은 벽에 걸린 사진이 뷸라에게 발키티에 맞설 힘을 주었다고 확신한다.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리고 나서 뷸라가 지하실로 쫓겨나 울고 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지하실에 숨어야 할 때가 있으면, 모두가 볼 수 있게 잘 보이는 곳에 전시될 때도 있는 법.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때가 있으면, 알지도 못하는 이가 내가 얼마나 아름답게 만개했는지 모두에게 칭찬하는 걸 놀라움 속에 목격할 때도 오는 법이다.
작가 부부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뷸라와 발키티인데, 발키티는 이 집에 처음으로 들어와 살게 된 고양이로, 이 집안 동물 서열 1위이며 항상 뷸라를 괴롭히는 bully다. 이 책방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어느 잡지사가 인터뷰를 요청한 뒤 고양이 뷸라의 사진을 찍고 나서인데, 해당 잡지를 테이블에 놀려놓으니 고양이 뷸라가 항상 잡지 위에 앉아서 "저거 보여? 저게 나야. 사인해줄까?"라고 말하듯이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 후 잔뜩 샘 이난 발키티가 심술을 부리자 뷸라는 또 괴롭힘을 당했는데, 늘 당하기만 했던 뷸라는 어떤 힘이 나서인지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작가는 얼마나 재밌게 풀어내는지, 고양이 사진을 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뒤진 나는 검은 고양이 뷸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는 작은 책방이 운영하기 힘든 점을 얘기해주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책 매입을 강매하는 사람들. 수명이 다 한 뒤 읽을 가치가 떨어진 엄청난 양의 신간 유행 책들. 라벨이 붙어 매입의 가치가 0인 책을 팔기 원하는 사람들. 대리 판매를 부탁하는 사람들 등등이다. 또한, 이별하고 남겨진 책을 기증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도 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170쪽,
하지만 사람들이 가져오는 책 상자에는 종종 어두운 면도 묻어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잭과 나는 책방에서 일하다 보면 이별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상대해야 하는지 순진하리만치 모르고 있었다.
(...)
가족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담긴 상자를 열어보는 일은 아무리 좋아봐야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정도라서, 그래서 이사를 하거나 떠나간 사람의 책장을 정리하는 사람은 기분이 가라앉게 마련이다. 남겨진 이들이 가져오는 상자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책꽂이 인류학은 복잡한 학문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집 서재를 조사해보면 된다. 한 인간의 소장 도서들을 보면 그 사람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여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뇌 수술만큼이나 누군가의 은밀한 공간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낯선 사람에 대해 그렇게 속속들이 아는 것도 마음 불편한 일이다.
나는 유명한 중고서점 '알라딘'을 애용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중고책을 손에 쥘 때 한 번도 이 책의 전 주인이 누구였을 거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작가는 책방 운영이 활발해진 만큼 한 달에 두 어번 꼴로 이별 후 남겨진 책들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방문했다고 한다. 죽음 후 남겨진 책도 있었고, 사랑이 끝난 후 남겨진 책들도 있었다. 비단 책뿐만 아니라 떠나간 사람이 남겨 놓은 흔적은 언제나 빠르게 치워버리고 싶은 부분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책을 보면 그들에 대해 짐작이 가능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취향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가치관 또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내 책장을 보면 온통 문학으로만 채워져 있다.
나는 해가 갈수록 위로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이제 점점 위로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바로 장례식이다. 어린 시절에는 장례식이고 결혼식이고 먼 얘기였지만, 점점 갈수록 장례식에 갈 날이 잦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때마다 나는 어떤 조의를 표해야 할지 난감하다. 가까운 사이거나 먼 사이거나 상관없이 위로를 건네는 말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내가 만약 책방을 운영한다면 남겨진 이들이 가져온 책들을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매겨야 할 때의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저자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있게 행동했다. 또한,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알고 보면, 책장에서 만나는 가장 무섭고 가장 힘들고 가장 슬프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라 손님들 안에 담겨 있다."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도 지능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똑똑하지 않으면 남들의 감정을 어루만질 수 없는 것 같다. 작가는 실제로도 박사인데 인간관계를 너무나도 잘 다루어서 언젠가 미국에 갈 때 버지니아 주를 들려 작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작가는 알까? 먼 곳에 있는 한국말로 번역된 책을 읽은 한 저자가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안정을 취했는지.
271쪽,
이솝우화 중 참나무와 갈대의 이야기를 아는가? 참나무가 갈대에게 곧 불어닥칠 폭풍에 맞서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했는데, 거센 바람이 참나무를 뿌리째 뽑아 날려버린다. 참나무는 속절없이 날아가면서, 자기처럼 거대한 나무도 폭풍에 못 견디는데 힘없고 조그만 갈대가 강가에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이 놀랍다고 소리친다. 그러자 갈대는, 때로 작고 우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제일 커다란 존재로 사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고 대꾸한다.
다시 취업준비를 하는 나는 반복되는 인생의 사이클에 어떠한 의욕도 없어졌다. 최근에는 현실의 벽이 얼마나 크고 대한민국에서 문과생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어 평소에는 잘하지 않았던 자기 비관에 빠지기도 했다. 세상엔 커다란 존재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운동을 삼 주정도 쉬게 되자, 원래 심했던 PMS(생리 전 증후군)이 다시 재발했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지고 한없이 감정적이게 되는... 그래서 한 주동안 우울하지만 우울함에도 지쳐있는 시간들을 보냈는데 이 책을 읽게 되면서 생기를 조금씩 되찾게 되었다. 내가 잠시 접어 두었던 꿈을 펼쳐서 보여준 이 책에서 나는 위로를 얻은 것이다. 조바심 내지 않고 커다란 참나무를 부러워하지 않는 갈대의 삶을 존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