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요즘 읽을 책이 없나 서점을 기웃기웃, 친구들에게 물어서 알게 된 책 '대도시의 사랑법'
그저 표지가 너무 예쁘고, 박상영 작가의 책을 한 번 읽고 싶어서 구매를 했다.
이 책을 읽는 나의 감정은 페이지마다 조금 달랐는데, 나에게 책을 추천해준 친구에게 섣불리 "내 스타일 아닌데."라고 했던 게 미안해졌다.
읽어야 할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을 수록 나는 이 책이 맘에 들었고, 오히려 나쁜 편견을 심어줄 거라고 걱정했던 처음의 나와 다르게, 오히려 내 나쁜 편견을 바꾸어 준 책이구나. 라고 인정했다.
나는 개방된 사람. 성에 편견이 없는 사람. 스스로 꽉 막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나는 게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흘기며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도 처음에는 성관계에만 집착한 듯 보여 불편했는데, 생각해보니 불편한 것은 책이 서술된 방식이 아니라 내 고정관념인 것 같다.
더불어 말하자면 태그로 걸어놓은 LGBTQ는 성 소수자들로, 미국에서 잠깐 공부했을 때 배운 용어인데, 현재는 널리 쓰인다.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transsexual, que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 ally, pansexual)
+ 감상평 중에 잘못된 용어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배우고 있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화자는 너무나도 외로운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나서의 남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178쪽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는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외면을 받고 원망을 받아온 것을 안다. 요즘이야 더이상 '소수자'로 칭하기도 민망하고 개방되었으나, 아직도 많은 LGBTQ 사람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리는 것을 어려워 한다.
그런데 박상영은 다르게 보았다. 그들도 부모를 원망한다. 자신들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들이, 감정들이 사회로 부터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들로부터 너무 쉽게 상처를 받는다.
화자의 엄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것이다.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무시한다. 알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라는 듯이 아니면 잠시 화자가 착각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한 태도는 상대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228쪽
언젠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둘이 함께 누워 있던 밤에, 규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카일리가 있음에도 그때 왜 선뜻 나와 사귀기로 했냐고.
-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좋아하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이유를 캐묻게 된다. 왜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화자는 에이즈를 '카일리'라고 이름짓고 책에서는 단 한 번도 에이즈라는 단어를 내비추지 않는다. 화자는 '카일리'로 인해 늘 사방이 가로막힌 인물이다.
생각보다 '에이즈'는 많은 제한을 걸어둔다. 회사 입사때 신체 검사를 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큰 불안감을 준다고 한다. 또한 외국에서 체류할 때도 쉽지 않다. 책 속에서 카일리는 중국에서 일을 할 수 없도록 화자를 굴복시켜버린다.
화자의 연인 규호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해외로 점점 더 활개를 치며 날아다닌다. 반면에 화자는 모든 것이 개방돼 있을 것만 같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을 것 같은 대도시에서 갇혀지낸다. 카일리 때문에.
에이즈뿐만 아니라 모든 병에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보통은 규호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즈니까"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성병이 있는 인물들이 얼마나 제약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비추어준다.
38쪽
- 학생이 꼭 내 딸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래. 어린 나이에 그렇게 함부로 살면 어떡하나. 여자의 몸에 제일 해로운 게 뭔지 알아요? 방종하고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이야. 알겠어요?
- 임신이랑 출산이 제일 나쁘다던데요?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인터넷에서 봤어요. 여자 몸에 태아는 이물질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요. 임신이랑 출산만큼 몸에 해로운 건 없다던데. 그러니까 수술해주세요.
- 누가 그럽디까? 누가 그래!
알다시피 대한민국에서는 얼마전, 헌법 재판소에서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더이상 낙태 '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용한 부분은 말그대로 유쾌 상쾌 통쾌하다. 낙태를 '죄'라고 여기던 대한민국. 낙태 또한 남자의 동의없인 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낙태가 불법이던 대한민국.
이 책은 낙태에 대해 우울하지도 않고 죄의식을 주지도 않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압박은 여성이 홀로 견뎌내야 하는 짐이다. 환영받지 않는 환경에서의 임신은 뜻밖에 생긴 병과도 같다. 남성들은 그동안 낙태에대해 죄책감도 갖고 있지 않았고, 오로지 여자에게 죄책감을 덮어 씌웠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결혼해주면 감사해했고, 그렇지도 않으면 뜻밖의 임신은 평생 죄책감을 갖게 하거나 숨겨야할 치부에 불과했다.
우리는 아직도 피임이나 임신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 성교육은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더 자세히 알려주어야 한다. 나는 불과 1년 전에 출산 후 몇주동안 나오는 '오로'때문에 큰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하는 것을 알았으며, 머리가 많이 빠지고 겨드랑이가 검게 변하며 뼈가 삯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가임기 여성을 통계자료로 내놓는 무식한 사회다. 여성을 그저 애 낳는 기계로 생각하고 있으며, 임신으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많은 고통들을 쉬쉬하며 숨겨왔다. *잊지말자 노콘노섹
273쪽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
윗문장이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후 남겨진 사람의 심정을,
윗문장이 말해준다.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을,
윗문장이 말해준다.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기회조차 없다는 것을,
윗문장이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