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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Jul 18. 2019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을 위한 근사한 변명들

게으른 게 아니라 창의적으로 바쁜 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벼락치기의 신, 꾸물대기의 마스터, 빈둥대기의 대통령, 미루기의 달인이다. 미루기에 있어서 만큼은 진정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라 자부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눕기이며,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 내 점심 메뉴를 정해주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들로는 집 밖, 오르막길, 달리기, 알람시계, 어디쯤 왔어? 등이 있다. 살면서 들어온 익숙한 말들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넌 절대 자취하지 마... 굶어 죽은 채로 발견될 게 뻔해."

"살다 살다 너 같은 애 처음 본다."

"선배님... 이럴 거면 어서 집에 가서 누우세요."

"누나, 그러다 소 된다. 일어나."

"젊음이 아깝지 않아? 나가서 놀든지 뭐라도 해!"


이쯤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거 맞지?






미루기는 진정 나쁜 것일까?


'미루기'라는 테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심리과학 분야에서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성격이 아니라 뇌가 다르다고 말한다. 모호함에 대한 불안이 커서 행동을 주저하는데 다시 말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일상에서는 흔히 의지박약, 한심, 태만 등의 단어와 함께 사용되면서 조롱과 멸시 때로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몹쓸 습관이자 이겨내야 할 내면의 적으로 포지셔닝되어 있다. 미루기가 이토록 나쁘다면 결국 나는 '문제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여기, 불리한 전장에서 외롭게 사투를 벌이는 미루기 달인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미루기의 천재들>이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 앤드루 산텔라가 글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화장실에 들어가 타일과 타일 사이의 틈을 닦는 것이다. 깨끗한 화장실을 원해서도, 단순 노동이 창의성에 도움이 돼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괴롭히는 글쓰기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명분이나 근거를 찾기 위해서다. 미루는 습관을 버리는 데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 미루기의 역사를 추적하며 갖가지 변명과 술책을 수집하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한마디로 조금 미친 책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루기 거장은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을 수 있다. 야심 차게 약속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건 그의 기본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다빈치는 늘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만 결코 실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오늘날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헬리콥터나 잠수함, 심지어 로봇의 도안을 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시절 레오나르도를 고용한 이들이 궁금해했던 건 단 하나였다. 과연 이자가 약속한 날에 약속한 일을 마칠 것인가?

<미루기의 천재들> p.110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학, 해부학, 천문학, 공학을 넘나들며 다방면에서 유의미한 진전을 이뤄낸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평생 만성적으로 미루기를 시전 한 그가 만일 고객 만족을 위해 마감을 지키는데 열중했다면 과연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될만한 가치 있는 일들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혹시 미루기는 독창성을 발휘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미루기와 천재성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자꾸만 할 일을 미루는 나는 혹시 천재?


우리가 미루기와 매일같이 사투를 벌이는 이유에 관해 팀 어반(Tim Urban) 보다 더 탁월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의 심리>라는 테드 강연을 통해 미루기 달인의 머릿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적이 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합리적 의사결정자'가 있다. 평소에는 정신의 운전대를 잘 잡고 있지만 뭔가 어렵고 중요한 일이 닥치면 '순간만족 원숭이'가 날뛰며 운전대를 뺏는다. 내가 글을 쓰기 전에 느닷없이 안 하던 청소를 하고, 이불을 개고, 조카랑 놀아주고, 책장을 정리하다가, 유튜브를 열어 뉴진스의 안무 영상을 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미루는 사람의 머릿속


원숭이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오직 '패닉 몬스터' 뿐이다. 막판에 막판에 막판에 막판까지 미루다가 도저히 안 될 상황에서 소환된다. 원숭이는 숨어버리고 비로소 합리적 의사결정자가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이것이 '미루는 사람이 일을 하는 시스템'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최종적으로 효과는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이 3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미루기 시스템은 독창성과 관련이 있을까? 그 힌트는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서 찾을 수 있다. 창의력은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원리를 알면 평범한 사람들도 독창적인 사람, 즉 오리지널스(Originals)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미루기를 대하는 오리지널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페이스북의 COO였던 셰릴 샌드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때때로 할 일을 미루는 것이 바람직할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나와 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막판까지 할 일을 미루는 것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실행 가능한 일은 당장 해치워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뭐든 빨리 끝마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압박감을 내가 떨쳐버린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마크 저커버그도 매우 흐뭇해할 것이다. 게다가 애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나와 내 팀 구성원들이 더 나은 성과를 내도록 해줄지도 모른다.

<오리지널스> p.9


만일 그의 말대로 미루기가 바람직한 어떤 경우가 존재한다면 분명 보통의 미루기와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어쩌면... 나는 문제아가 아니라 오리지널스일지도 모른다. (저기, 그건 아니고요.)






오리지널스의 미루기는 무엇이 다를까?


<오리지널스>는 미루는 녀석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제대로 할 마음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네 명의 학생이 사업을 하겠다며 애덤 그랜트에게 찾아왔을 때 그는 절대 이들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덤 그랜트는 '미리 해치우기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고 꾸물대기만 하고 졸업 후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안전하게 사업을 하겠다는 그들은 애덤 그랜트의 눈에 완벽한 삼진아웃 대상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미루기 달인들이 만든 회사는 2015년에 패스트 컴퍼니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온라인 안경 시장을 뒤흔든 '와비파커 Warby Parker'의 이야기다.


빠르게 일을 처리하며 사업에 올인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통념에 빠져있던 애덤 그랜트는 조직심리학을 연구하는 교수로서 자신의 예측이 틀린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결국 오리지널스의 미루기와 보통 사람의 미루기가 무엇이 다른지 발견한다.


무언가를 빨리 해치우는 사람은 패닉 몬스터가 일찍 튀어나오는 사람이다. 일을 시작하는 초반부터 공포에 사로잡혀 일을 빠르게 처리해 버린다. 미루는 사람은 순간 만족 원숭이의 힘이 강하고 패닉 몬스터가 너무 늦게 나타난다. 오리지널스는 이 두 유형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해결할 작업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의도적으로 작업을 미루면 창의성을 발휘할 확률이 높아진다. 빨리 해치우는 사람은 다소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 한편, 오리지널스는 생각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일을 완성할 다양한 방법을 찾는다. 마지막까지 미루면서 더 좋은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셰릴 샌드버그 같은 '빨리 해치우기 달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오리지널스에게 미루기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행위다. 할 일을 미루면 생산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창의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리 움직이는 사람(First Mover)이 반드시 원조(Original)가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움직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일 뿐 목표가 아니다. (...) 누군가 따라와서 1위 자리를 빼앗는다면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차라리 '라스트 무버 Last Mover'가 되는 편이 낫다."라고 피터 틸이 말하지 않았던가.






어느 미루기 달인의 이중생활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는 또 한 명의 미루기 달인이 등장한다. 주인공 호타루는 집과 회사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그의 이중생활은 건어물녀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미루는 자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루기 달인의 이중생활을 고발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드라마 <호타루의 빛>


사회초년생 시절에 처음 목격한 이 이중 생활자는 내 롤모델이었다. 나는 못 말리는 미루기 달인이지만 일을 잘하는 것과 미루기는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와 운동복 차림으로 바닥에 누워 빈둥거리는 호타루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가 한 명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어느 때든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동시에 늘어져 있을 수 있고, 일을 미루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야심 차게 성취해낼 수 있다면.

<미루기의 천재들> p.233


나는 회사에 가면 집에서 눕고 싶고, 집에서 누워 있으면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다. 시간 관리법을 알려주는 자기 계발서와 미루기의 역사를 동시에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에서의 나와 회사에서의 나를 의식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지금은 두 개 자아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아마도 회사에 있는 디자이너 이진선을 가족들이 본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일정 머신이기 때문이다. 한편 집에 있는 건어물녀 이진선을 직장 동료들이 본다면 또한 몹시 놀랄 것이다. 누구보다 심하게 꾸물거리는 미루기 달인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면 회사에서 99를 쓰고 집에 돌아와 남은 1로 빈둥거리는 생활이 좋다.


누군가는 기본값이 '미루는 사람'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본값이 '빨리 해치우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기본값이 어느 쪽이든 다른 쪽의 기본값을 가져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것이 위대한 오리지널스는 아닐지라도 베이비 오리지널스 정도는 될 수 있게 만들어주리라 믿는다.


미루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앤드루 산텔라 역시 이중 생활자이면서 동시에 미루기의 역사를 추적하는 창의적인 오리지널스다.


눈부신 길을 따라 느긋하게 산책을 해야 하는데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런던으로 돌아가 업무를 처리하는 거야. 어른스럽게 행동해, 프로답게 굴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이 길을 따라가면 해야 하는 일을 미뤄야 한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길 위의 모험을 미뤄야 한다. 어떤 선택을 내려도 무언가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미루기의 천재들> p.231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때마다 조금 더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시간을 배분해 행동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요하고 어렵기 때문에 또다시 일을 미루기 시작한다.


미루는 마음은 지극히 인간적인 특성이다.






지금도 최선을 다해 미루기와 단판 씨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훈련을 통해 디자이너와 건어물녀라는 두 개 자아를 분리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제3의 자아인 작가 이진선은 여전히 내적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글 하나를 쓰는데도 순간만족 원숭이가 미친 듯이 날뛰기 때문에 한 글자, 한 문장을 쓰는 동안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주워 담느라 바빠 죽을 지경이다.


팀 어반과 애덤 그랜트가 미루기를 주제로 강연한 테드 영상도 봐야 하고, 미루기에 관한 새로운 책을 발견했으니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야 한다. 혹시 오리지널스와 관련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싶어 책장에서 10권의 책을 꺼내 밤을 새우며 읽고야 만다. 동생은 도대체 시작은 안 하고 늘상 빈둥대기만 하느냐고 세상 한심하다는 듯 물어보지만 나는 결코 게으른 게 아니다. 창의적으로 바쁜 것뿐이다! (정말일까)


먼저 내키는 대로 책도 한 권 더 읽고, 콜트레인 음반도 듣고, 샤워도 하고, 공원도 산책한다. 이 모든 건 '글쓰기'라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때가 되면 '글쓰기'를 멈추고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할 거야.

<미루기의 천재들> p.107






참고 도서

애덤 그랜트 <오리지널스>

앤드루 산텔라 <미루기의 천재들>

피터 틸 <제로 투 원> 80p





창의적인 미루기 달인이 되려는

사람을 위한 추천 자료


영상 :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의 심리 by 팀 어반


영상 : 독창적인 사색가의 놀라운 습관들 by 애덤 그랜트


책 : 미루기의 천재들 by 앤드루 산텔라


책 : 힘든 일을 먼저 하라 by 스콧 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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