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50만 원짜리 경리를 연봉 1억 디자이너로 만든 원씽
사회 부적응자.
20대 내내 나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처음 취업한 회사는 부부가 운영하는 자판기 회사였다. 갓 20살이 된 나는 직원 4명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조직에 월급 50만 원짜리 경리로 입사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교복을 입고 면접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미술학원을 다닐 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출근 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직원들의 책상을 닦고 커피를 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첫 업무였는데 영업 사원 중 한 명이 커피가 너무 진하다며 다음부터는 연하게 타 달라고 했다. '커피가 너무 쓰다는 말이니까 우유를 더 넣으면 되겠지?'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말을 들었다. 물을 더 넣어 묽게 해 달라는 의미라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 정도로 말귀를 못 알아 들었다.
은행 심부름 역시 나의 주 업무였다. 어느 날, 급하게 막아야 하는 어음이 있어 통장에 거액의 수표를 끼워 넣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원에게 통장을 내밀었을 때 수표는 없었다. CCTV를 확인해도 찾을 수 없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행히 길에 떨어진 수표를 누군가가 찾아주었는데, 상황이 정리되자 내게 일을 주던 경리 언니가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너 평생 월급도 못 받으면서 노예처럼 일 할 뻔했어.”
그는 대표의 아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나약했고 두려웠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요즘도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와 직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였던 나는 매일 같이 지적을 당했다. 그렇게 3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입시를 준비해 23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일을 너무 못해서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갸우뚱한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며. 울퉁불퉁 모난 돌이 수천번 정을 맞아 둥글둥글 해질 때까지 어떤 사회화 과정을 거쳐왔는지 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 내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연봉 1억을 벌고, 출간 작가가 되고, 스타트업을 공동 창업했다. 역시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커리어 여정이다.
이제 나는 안다. 우리는 모두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의 도약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 하나, 원씽(One Thing)이 있다는 사실을.
1980년대에 드라이퍼스 형제는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를 관찰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그들이 제시한 5단계 기능 습득 모델을 일명 드라이퍼스 모델 (Dreyfus model of skill acquisition)이라 부른다. ‘실력은 연차와 비례하지 않는다’에서 말했듯이 전문가로 성장하는 다섯 단계는 결코 건너뛸 수 없는데, 초보자일수록 매뉴얼에 의존하고 전문가일수록 직관을 활용한다. 단계를 올라서는 건 단지 더 똑똑해지거나 더 빨라지는 개념이 아니다. 전문성의 수준에 따라 한 사람의 능력, 태도, 관점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아래 분포도는 한 분야의 사람들이 단계별로 얼마큼 분포해 있는지 알려준다. 나는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두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2단계인 고급 입문자에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평생 2단계에만 머물다가 은퇴한다. 연차가 꽤 많이 쌓여 ‘그래도 내가 중간은 가지.’라고 생각한다면 높은 확률로 착각이라는 의미다. 10년 차 고급 입문자가 팀장이 되어 재앙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림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특이점은 가장 높은 5단계의 전문가가 고작 1~5%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2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대략 절반씩 줄어드는 반면 숙련자에서 전문가로 넘어가는 단계에서만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100명 중에 고작 1명만 전문가라니. 연봉 1억 디자이너가 되었어도 나는 결코 전문가가 아니었다.
일에서 어려움이 사라지고 먹고 살만큼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래서 다음은 뭐지?’라는 생각이 한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온 내게 전문가로 도약하는 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커리어 정체기에 빠졌다.
‘나는 왜 하나의 직무로 10년을 일했어도 숙련자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까?’
‘나는 왜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으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걸까?’
일을 잘하는 것 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물음표를 간직한 채로 몇 년을 보냈다.
소프트웨어 장인 협회(LSCC)를 설립한 개발자 산드로 만쿠소는 책 <소프트웨어 장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웨어 장인은 마스터로서 수련생을 멘토링하고 그들의 여정에 도움을 준다. 지식, 아이디어, 성공 그리고 실패까지도 커뮤니티에서 공유하고 토론하여 업계가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 소프트웨어 장인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 하는 겸손한 사람이어야 하고 경험이 적은 개발자와 지식을 공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장인> p.71
그의 말에 의하면 마스터 단계까지 올라간 전문가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잘하는 사람이다. 후배들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전문가는 지식의 근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역량이란 배우고 실행하면 향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면 경쟁자 간에 차이가 미미해진다.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성과에는 한계가 있기에 혼자서만 잘하는 사람은 4단계인 숙련자까지 올라가더라도 그 이상으로 도약하기는 어렵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상위 1% 전문가가 된다는 건 개인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전문가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단지 성과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숙련자와 전문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영향력은 오직 커리어 브랜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직장인의 브랜딩이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존재감을 갖는 것이다. 존재감이란 역량과 철학을 드러냄으로써 ‘이런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일하는 분야의 사람들이 아는 상태를 의미한다.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생겼을 때,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 할 때 머릿속에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커리어 브랜딩이다.
존재감을 가진다는 건 전문가가 되는 일이며 이는 곧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하는 것이다. 커리어 설계는 곧 브랜딩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에이전시에 취업한 이후로 10년 동안 그림자처럼 살았다. 언제나 조용히 한발 물러나 있는 성향이었기에 업계는커녕 회사 안에서조차 존재감이 없었다. 디자인의 기능적인 역량을 개발하는 것 만으로는 일의 수명이 앞으로 길어야 10년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커리어가 정체되었다고 느끼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시기에 절박한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글이다. 마침내 온라인에 나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후로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기회들이 찾아왔다. 그것이 불과 3년 전이다.
나는 언제나 일과 전문성 그리고 커리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배우고, 일에 적용하고, 생각했다. 사수 없이 일하며 고군분투했지만 물어볼 곳이 없어 스스로 찾았던 지식들을 하나씩 기록하고 드러내면서 나의 고민이 모두의 고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때가 내가 일하는 회사와 업계에서 존재감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후 1년 만에 출간, 강연, 사업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회사는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다. 지원자는 많은데 ‘좋은 인재’, ‘우리와 딱 맞는 사람’은 왜 그리 찾기 어려운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지인들을 통해 물색하거나 채용 서비스를 활용해 돈과 인력과 시간을 쓴다. 적절한 사람을 찾는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리소스를 필요로 한다.
출판사 역시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다. 가능성 있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늘 안테나를 돌린다. 퍼블리, 클래스101 등 크리에이터를 필요로 하는 각종 콘텐츠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레이더망에 걸리는 건 업계마다 존재감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이름이 브랜드가 되었다고 반드시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름 없는 사람이 전문가일 수는 없다. 전문가라면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함으로써 필요할 때 나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커리어 도약의 원씽이다.
이 글은 '아하레터'에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커리어를 위한 브랜딩 글쓰기를 주제로 한 달에 한 번씩 총 6번 연재합니다. 처음 발행하는 해당 글만 아하레터의 동의를 얻어 브런치에 공유합니다. 이후 연재 글은 아하레터를 구독하면 볼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