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접 본 것일까, 들은 것일까?

영화 <얼굴>과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by 일상의 탐험가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며칠 전 넷플릭스에 미리 다운로드해 두었던 영화 <얼굴>을 보았다.

작년 가을쯤 개봉한 작품으로, 주연은 배우 박정민이었다. 박정민은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청년이 된 아들을 연기하며 1인 2역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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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핵심 주인공은 박정민의 ‘엄마’다.

엄마가 주인공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얼굴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고개를 숙인 옆모습만이 스쳐 지나간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정면을 피하고, 시선은 늘 뒷모습에 머문다.

관객은 끝내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다. 얼굴이 보고 싶어 괜히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릴 정도로, 엄마의 얼굴은 철저히 숨겨져 있다.

대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어눌하고 서툰 말투,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언행,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내뱉는 “괴물 같다”, “흉측하다”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평가뿐이다.

그 말들을 반복해 듣는 사이, 관객인 우리는 어느새 엄마가 단지 외모가 수수한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못생겼을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심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말은 반복될수록 사실처럼 굳어지고, 평가는 어느새 전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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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인 아버지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따뜻한 배려와 느리지만 다소곳한 말투, 그리고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이끌려서 결혼을 했다. 보지 못하기에 오히려 귀로 들리고 피부로 전해지는 그 온기에 기대어, 그는 아마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아름다울 것이라고 조심스레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관객 역시 엄마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채 타인의 말과 평가만으로 그녀의 얼굴을 상상한다. 우리는 보고 판단하는 대신, 전해 들은 말에 기대어 상상하는 쪽을 선택한다.

아버지는 결국 주변 지인들로부터 아내의 외모에 대한 이른바 ‘진실’(?)을 전해 듣게 된다. 그 말들은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끝내 보지 못한 얼굴을 대신 만들어 낸다. 분노는 그 얼굴을 향해 쏟아지고, 그는 급기야 아내의 목을 조른다.

아버지가 죽인 것은 아내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말로 완성된 하나의 상(像)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맹인인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위치에 서게 된다. 보지 못하면서도, 타인의 말만을 믿고 이미 안다고 확신하는 자리다.


영화의 말미, 엄마의 얼굴을 모른 채 자라온 아들이 마침내 궁금했던 엄마의 사진을 건네받아 확인하는 순간, 우리 역시 동시에 그 얼굴을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엄마 얼굴의 진실이 밝혀지는 이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기대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확신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은 흉측하지도, 괴물처럼 못생기지도 않은, 그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다. 예상이 무너지는 순간,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아들은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울지 않지만, 아마 같은 감정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충격과 함께, 뒤늦게 밀려오는 미안함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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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채 타인의 말에 의해 확신해 버리는 이 오류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엄마가 근거 없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 ‘끔찍할 만큼 못생긴 여자’로 낙인찍혀 고통받다 끝내 남편에게 죽임을 당하듯, 카타리나 블룸 역시 ‘언론’이라는 언어에 의해 난도질당하며 범죄자로 만들어진다.

카타리나 블룸 역시 처음부터 의심받을 이유가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단지 한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났고, 하룻밤을 함께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남자가 수배 중인 테러 용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타리나는 순식간에 ‘사건의 중심’이 된다.


경찰의 수사는 곧 언론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신문은 사실을 전하기보다, 독자가 원하는 서사를 만들어 낸다. 기사 속에서 카타리나는 ‘순진한 피해자’가 아니라, ‘은밀한 공모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 ‘위험한 사상에 매혹된 인물’로 변모한다. 단정적인 형용사와 암시적인 문장들이 쌓이면서, 그녀의 얼굴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기사 속 언어로 재구성된다. 독자는 그녀를 본 적이 없지만, 이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믿게 된다.


카타리나는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왜 그 남자를 만났는지, 왜 도와주었는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녀의 해명은 언제나 늦다. 이미 언론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 앞에서 진실은 설득력을 잃는다. 침묵해도 의심은 커지고, 말해도 왜곡된다. 판단은 이미 끝났고, 그녀는 그 판단을 되돌릴 언어를 갖지 못한다. 결국 카타리나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경찰도, 법도 아니다.

그녀를 파괴하는 것은 반복되는 기사와 제목, 그리고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시선들이다. 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전에, 사회는 이미 그녀를 범죄자로 규정해 버린다.

그녀가 잃은 것은 자유 이전에 명예였고, 그 명예는 언론의 언어 속에서 가장 먼저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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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엄마와 카타리나 블룸은 이렇게 닮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직접 확인되지 않은 실체 대신, 타인의 말과 시선 속에서 먼저 규정되었고, 그 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처럼 굳어졌다. 보지 않았음에도 안다고 믿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이 만들어 낸 폭력이 두 인물의 삶을 끝내 파괴한다.

어쩌면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말로 먼저 판단해 버린 사람들, 소문과 평가를 통해 어떤 얼굴을 상상해 놓고 정작 확인할 기회가 와도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던 순간들.

우리는 종종 사실을 알기 전에 이미 확신해 버리고, 그 확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마주한다. 그때 남는 감정은 분노나 충격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미안함에 가깝다.

영화 속 엄마와 카타리나 블룸은 그래서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겪은 비극은 특별한 악의 결과라기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반복해 온 시선과 언어가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잔인하게 작동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타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지나쳐 온 장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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