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 아날로그의 후퇴
샘터가 무기한 휴간한다는 뉴스를 이제서야 보았다.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온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오는 동안 세상은 쉼 없이 바뀌었고, 나는 그 변화의 가장자리에 서서 새로운 것들을 맞아들이기도 했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은 여러 번 배웅해 왔다.
인터넷과 AI의 시대는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었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뒤로 밀어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소중한 작은 아날로그 종이책마저 진공청소기 속으로 밀어 넣듯 삼켜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샘터는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고 얇은 잡지책이었다.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는 기차를 타기 전, 나는 습관처럼 한 권씩 사곤 했다. 2~3시간 남짓 걸리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알맞은 분량이었다. 나를 비롯해 짧은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은 기차역에서 샘터를 집어 들었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던 기다림을 함께 견뎌 주던 잡지였던 셈이다.
샘터는 유명 작가들의 글보다 일반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긴 기고 형식의 글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소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며 겪고 느낀 이야기들에는 마음을 데우는 조용한 위로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샘터는 그런 잡지였다.
샘터가 인기있던 그 시절은 기다림이 생활의 일부였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어서 답답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카페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상대를 기다려야 했고, 집 전화로 전화를 걸어 바로 받지 않으면 이유를 모른 채 연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샘터 같은 조그마한 잡지나 휴대가능한 정도의 크기의 책을 읽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을 슬쩍 구경하거나,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시간은 느리고 조용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쉼'이자 '여유'였다.
휴대폰이 생겨나고, 그 휴대폰이 손안의 세계가 된 뒤로 기다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작은 화면 하나로 웬만한 일들이 해결되면서, 기다릴 이유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지하철이나 약속 장소에서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안에서는 뉴스와 대화, 쇼핑과 길 찾기가 끊김 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생각이 멈춰 서는 순간도 점점 드물어졌다. 한때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비워 두어도 괜찮은 쉼이었지만, 이제는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시간이 되었다. 빈 시간은 곧바로 다른 것들로 채워진다. 남겨두는 시간이 있거나 조금의 공백만 생겨도 우리는 자동으로 화면을 켠다. 뉴스를 훑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필요하지 않아도 마치 강박처럼 무언가를 소비한다.
아날로그의 시간은 남겨 두는 것이었고, 디지털의 시간은 채워 넣는 것이다. 종이책은 읽다 멈출 수 있었지만 화면은 끊임없이 다음을 요구한다. 페이지의 여백은 생각을 허락했지만, 스크롤의 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손에 만져지던 종이는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크린 화면의 터치가 대신한다.
나만 해도 이제는 손으로 글씨를 쓰기보다 어느새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쪽이 훨씬 익숙해졌다.
이런 시대를 샘터 같은 작은 잡지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밀려나 있다가 어느새 절벽 끝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샘터가 ‘폐간’이 아니라 ‘휴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말의 회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일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오겠다는 뜻,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올게.” 그 정도의 약속처럼 느껴진다.
차가운 냉동실에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샘터가, 얼었던 물이 서서히 녹아 다시금 콸콸 흐르는 새로운 샘터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너무 빨라져 다시 느린 것이 필요해지는 날, 손에 쥘 종이가 다시 그리워지는 날, 샘터는 그렇게 아주 조용히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유행이 돌고 돌아 그 옛날의 것들이 다시 돌아오듯 말이다.
나는 그 재회를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