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이엄마

지나간 인연

by 일상의 탐험가

긴 계단의 중간쯤에 서 있는 나이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고, 또 얼마나 잠시 머물다 떠났는지 이제는 정확히 세어볼 수도 없다.

가끔은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이미 연락이 끊긴 얼굴들이 먼저 떠오를 때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이 왜 지나쳐 갔는지, 무슨 이유였는지, 혹시 내 쪽의 문제는 아니었는지를 뒤늦게 되묻곤 했다. 안타깝거나 속상해서라기보다는, 이유를 알면 마음이 조금은 덜 억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질문들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일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따져보는 일은 생각만큼 의미가 크지 않다.

시절인연이라는 말 하나면 대부분의 설명이 끝난다. 그때의 내가 있었고, 그때의 우리가 있었으며, 잠시 같은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였던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조건이 있었고, 같은 공간에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조건이 사라지면 관계도 함께 흩어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로, 시간이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한때는 가까웠고, 그 시절 덕분에 서로 좋았으며, 서로에게 고마웠다는 사실만 남아도 충분하다.


나는 나중에 후회하는 일을 유난히 견디지 못하는 편이라, 매 순간 가능한 만큼을 다하려 애써왔다.

그래서 어떤 인연이 끝난 뒤에도 미련이나 후회가 없어서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때의 나로서는 더 보탤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절이 다해 지나간 인연들 가운데서, 유독 가끔씩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세인이 엄마.


세인이 엄마를 처음 만난 것은 첫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위해 2주간 머물렀던 산후조리원에서였다.

나름 고르고 고른 그곳은 내가 입소하던 날 막 문을 연, 새로 생긴 조리원이었다.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는 이제 와 생각해보면 분명하다. 그 결정은 꽤나 젊은 시절의 나다운 선택이었다.

첫째로 이름이 유난히 세련되게 느껴졌다. 한스케어텔.

보통은 ‘00산후조리원’ 같은 이름이 대부분인데, 그곳은 이름만으로도 산후조리원이라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철역 바로 옆이었고, 백화점도 걸어서 닿을 만큼 가까웠다.

몸을 쉬러 가는 곳이면서도,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 있지는 않은 느낌이 좋았다.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곳이라 전체적으로 깔끔했고, 산후조리를 돕는 장비들 역시 대부분 최신식이었다. 그 점도 선택에 적잖이 작용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곳의 하루는 거의 비슷한 리듬으로 흘러간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수유를 하고, 잠을 잔다. 답답해지면 잠시 거실에 나와 앉아 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단순하고 반복된 일상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는 눈인사 정도만 겨우 나누는 편이었고, 출산과 처음 겪는 몸조리로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다. 지쳐 있었고, 그만큼 쉽게 가라앉아 있었다.

똑같은 유니폼 속에서는 나이나 직업, 그 밖의 사적인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가려진다.

사실 그런 정보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를 낳은 산모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연대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친밀감은 애써 만들지 않아도,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로를 약속이나 한 듯 ‘조리원 동기’라고 불렀다.

낯선 시작을 같은 시기에 통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은 정확했다. 처음 겪는 시간을 나란히 지나고 있는 사이를 동기가 아니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


2주라는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식사때마다 식당에서 눈이 마주치고, 수유실에서 짧은 말을 건네고, 비슷한 시간에 같은 일정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그들 중에는 만화에 나올 법한 커다란 눈망울 때문에 유난히 어려 보이는 엄마가 한 명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웃음소리도 컸고, 깔깔거리며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조용히 쉬고 싶었던 나에게 다소 요란하게 시끄러운 그녀는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지고 있는 간식을 늘 먼저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끄럽고 수다스럽다는 인상과는 다르게, 그 행동에는 계산이 없었다. 가진 것을 혼자 챙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누는 태도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소란스러웠던 그녀의 모습은 조금 덜 거슬리게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속에서 그녀를 향한 거리도 아주 조금은 좁혀졌다. 그래서 아주 싫지는 않았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조리원을 나선 뒤에는 더 이상 정해진 일정도, 도움의 손길도 없었다.

그때부터 육아는 전적으로 나 혼자의 일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아기를 중심으로 한 하루가 단조로운 리듬으로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아이의 본능을 헤아리고 따라가느라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하루는 늘 전투를 치른 뒤처럼 끝이 났다.

집안에서 아이와 나, 둘만의 전쟁을 치르느라 하루를 버티는 와중에도 야속하게 그 틈을 비집고 외로움과 고독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에게 건네는 말은 많았지만, 그 말들은 늘 한쪽으로만 흘러갔다. 마치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이 느낀다는 그 기분을 내 몸으로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저 세인이 엄마에요. 지금 뭐하세요?”

그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서 묻는 짧은 안부가 아무런 흐름도 없이 정체된 것 같은 공기를 조금 바꾸어 놓았다. 아이와 나 둘 만 있던 공간에, 오랜만에 어른의 목소리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그 뒤로도 그녀는 “뭐 하세요?”로 말을 시작하며 종종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라며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자주 밖으로 나가며 그동안 쌓여 있던 고독과 외로움을 조금씩 털어냈다.


여전히 수다스럽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녀는, 조리원에 있었을 때처럼 좋은 것들을 먼저 스스럼없이 나누어주었다. 인천 친정에 다녀올 때마다 유명한 수제김을 사다 주었고, 괜찮은 육아용품이 있거나 아이들을 위한 좋은 놀이프로그램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었다.

내게 어른스럽거나 진중하게 특별한 조언을 해준 적은 없었다. 다만 집 안에만 머물던 나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들을 그렇게 하나둘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싫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수다스럽고 요란한 웃음이,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활력을 보태주기 시작했다. 철이 없어 보이고 아직 세상일에 서툰 어린 애기 엄마처럼 보였던 그녀는, 내가 상상으로만 남겨두었던 일들을 실제로 해보는 사람이었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있을 때, 내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갈증이 심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마실 만한 것은 물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냉장고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마침 세인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처럼 “뭐 하세요?”라는 말이 들리자, 애써 붙잡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풀렸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울음을 쏟아내며 말했다. 냉장고에 마실 게 하나도 없다고.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픈지, 그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 울음소리에 당황한 세인이 엄마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것을 한 아름 사 들고 나타났다. 냉장고 안은 금세 물과 음료로 채워졌다.


나는 원래 내 날것의 감정을 아무에게나 쉽게 꺼내보이는 편이 아니다. 특히 울음은 더 그렇다.

그런데 그날은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 흘러나왔다. 참거나 정리할 틈도 없이, 그대로였다.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인생의 예상 밖의 사건, 아빠의 죽음 이후로도 세인이 엄마는 우울해진 나를 종종 밖으로 불러냈다. 이유를 묻지 않았고, 상태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 “뭐하세요”라는 말로 하루를 흔들어 놓았다.

성가시게 느껴지던 수다와 요란한 웃음소리는 그때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소음이 아니라, 내가 다시 하루 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 있게 붙잡고 있는 소리였다.


세인이 엄마가 우리 아파트 가까운 쪽으로 이사를 오면서 우리의 인연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따져보니 대략 만 칠 년쯤 되었을 것이다.

세인이엄마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낳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즈음에는 남동생과 함께 식당을 열어 일을 시작했다.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남는 음식을 꼭 챙겨 전해주고 갔다. 밤이라 피곤했을 텐데도, 그 일을 빼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배려와 보살핌은 내 일상 속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요란한 수다와 웃음소리, 특유의 오지랖마저도 더 이상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제, 내가 하루를 견디는 데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마음 한편에 늘 일이 하고 싶다는 갈증이 남아 있던 것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살림을 꾸리는 일도 최선을 다했지만, 집 안에만 머무르는 삶이 그녀를 온전히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 마음은 말로 드러나기보다 행동으로 먼저 새어 나왔다. 자꾸 밖으로 향하는 눈빛, 이유 없이 바빠지는 하루들.

어느 해, 그 빈도가 눈에 띄게 잦아지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이상하리만큼 정확했다. 앞뒤를 재기보다 먼저 상상하고 곧바로 실행하던 그녀는, 떠나는 일마저도 그랬다. 예고 없이, 설명 없이. 역시 그녀다운 방식으로, 과감하고 돌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세인이 엄마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이상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며칠이 지났고, 그 사이 그녀의 친정엄마가 나를 찾아와서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하다 돌아가셨다.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세인이 엄마가 두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였다고 했다.

평소에도 나는 화풀이 삼아 속으로만 상상하던 일들을 그녀가 대신 실행해 주는 것을 보며 묘한 대리만족을 느끼곤 했지만, 이런 선택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남겨진 아이들과 세인이 엄마, 그 모두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놀라셨죠? 혹시 세인이 아빠에게서 저를 찾는 연락이 오면요, 그냥 모른다고 하세요.” 그 말은 설명도 변명도 아니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그녀는 종종 아이들의 안부를 물어왔다.

어린이집에 간 둘째가 잘 지내고 있는지 봐달라고 하거나,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한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에서 조금씩 거리를 만들었다. 이해하려 애썼지만, 그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던 그 거리만큼, 연락도 점점 뜸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내 눈에 그녀는 그저 철없어 보이지만 정이 많은, 조금 어린 엄마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렇게 과감하고 느닷없이 큰 선택을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오래 함께 지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 사람처럼, 혹은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제 갈 길을 찾아 떠나버린 인물처럼 느껴졌다. 날개옷을 다시 입고 날아가 버린 선녀를 남겨진 쪽에서 바라보는 기분이,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내가 애초에 선호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불쑥 들어와 몇 해를 흔들어놓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런 식의 등장은 처음이었고, 그런 식의 퇴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스치고 간 많은 인연들 중에 세인이 엄마가 떠올랐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내 감정을 다듬지 않은 채 흘려보내도 괜찮다고 느낀 사람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울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엄마라는 역할을 서투르게 시작하며 힘들고 고독했던 시기,

서른을 앞둔 나이에 아빠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우울하고 막막했던 시기.

그때마다 그녀는 “뭐 하세요?”라는 말로 나를 끊임없이 불러냈다.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있어서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외롭고, 심심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덕분에 나는 내가 있던 자리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 안과 우울함 속에만 머물러 있던 하루가, 그때만큼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 시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힘이 되었다.


벌써 긴 시간이 흘렀다.

세인이 엄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과 나이 터울이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중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에 들어갈 무렵처럼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떤 인연들은 오래 붙잡지 않아도,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제 몫을 다한 것처럼 남는다.

세인이 엄마는 내 삶에 그런 사람으로 있었다.

지금도 가끔 하루가 가라앉을 때면, 나는 그 말을 떠올린다.

“뭐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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