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왜 나만 두고 가는가
2026년 새해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매년 하던 일처럼 케이크 하나를 사다 놓고, 각자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아이들을 불러 거실에 앉혔다. 억지로 모아놓고 TV 속 카운트다운을 함께 바라봤다. 그 밤이 정말 엊그제 같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또 시작이네.”
올해도 안 넘어가고 엄마가 유난이라 생각했을 얼굴.
그냥 방에서 쉬고 싶은데 왜 불러내느냐는 눈빛.
마지못해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 얼굴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벌써 3월이라니.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릴 적, 연말이면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던 말이 떠오른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니.”
그땐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내가 닮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챈 뒤에야 조금 실감이 났다.
언제부턴가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리고 젊을 때는 하루가 길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은 합치면 예순 해쯤 되는 것 같았다.
언제 커서 이 지긋지긋한 공부와 시험에서 벗어나나 싶었다.
어른이 되는 시간은 인내를 요구할 만큼 느렸다.
스무 살 중반이 되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근 시간도, 월급날도, 달팽이보다 늦게 오는 것 같았다.
그때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기도 했다.
시간은 긴 터널 같았다.
지금은 다르다.
조금 전까지 1월이던 달력을 벌써 두 장이나 넘겼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환갑이고, 한숨 돌리면 팔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라는 놈이 혼자 액셀을 밟아 나를 인생의 끝으로 밀어붙이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겁이 날 때도 있다.
누가 들으면 과한 망상이라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의 나는 세월의 속도를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
시간이 고무줄처럼 제 마음대로 늘었다 줄었다 할 리는 없을 텐데.
생각해보면 내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젊음이 줄고, 기다림이 줄고, 설렘이 줄고, 새로울 것들이 줄어들면서 그 사이가 휑해진 것인지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은 뇌가 슬쩍 정리해버린다고.
심리학에서는 이를 ‘기억 밀도 이론’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으면 굳이 오래 붙들어둘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대신 낯선 공기, 뜻밖의 한마디, 평소 안 먹던 음식의 맛 같은 것은 또렷하게 남는다.
그런 날은 기억의 밀도가 촘촘해져 시간이 조금 길어 보인다고.
몇 달 전, 친한 언니가 한의원을 새로 열었다며 오라고 했다.
그곳에 새로 들여놓은 뇌파 장비로 가볍게 검사를 받아봤다.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과를 보던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자극이 좀 부족한가 봐. 감마 대역(γ band) 뇌파 활성도가 평균보다 낮게 나왔어.
새로운 인지 자극이 적을 때 이렇게 나오기도 해.”
아픈 데는 없는데, 뇌가 조용하다는 말이 괜히 마음을 찔렀다.
요즘 내 일상에 설렐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뜻처럼 들렸다.
안 그래도 시간은 빨라지고, 나이는 쌓이고, 기억력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뒤틀려 있던 참이었다.
정해진 반경 안에서 비슷한 일만 반복하며 사는 내가 못마땅했는데, 그 검사 결과가 괜히 도장을 찍어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새로운 것은 번거롭다.
긴장도 해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실패가 이어지면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그러니 ‘도전’보다는 그보다 안전한 ‘익숙함’을 택하게 된다.
늘 만나던 사람, 늘 가던 공간, 늘 해서 손에 익은 일들. 그렇게 하루가 또 하루와 닮아간다.
그래야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새로운 자극이 줄어드니 기억도 성글어지고,
성글어진 기억 사이로 시간은 더 빨리 빠져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아닌 것이 거의 없던,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시간이 길었던 것이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고,
처음 배우는 과목 앞에서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시험 한 번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절.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 업무를 맡고, 날 선 피드백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또 배우고, 친하지도 않은 다른팀 사람들과 서먹하게 일을 해야할 때.
돌이켜보면 나는 반복보다 새로움 속에 더 많이 서 있었다.
처음은 늘 또렷하다.
반복은 시간을 압축하고, 새로움은 시간을 조금 늦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도 거창할 필요는 없겠다.
가끔은 다른 길로 돌아가 보고,
계획에도 없던 것을 하나 배워보고,
낯선 사람을 만나보고.
그렇게 익숙한 일상을 조금 흔들어 두면,
시간도 잠시 멈칫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