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벼락을 맞는 나이

노화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by 일상의 탐험가

음악엔솔로지의 단편소설모음집인 "음악소설집"의 마지막 부분, 김애란 작가의 인터뷰 문장.

“전에는 널리 알려진 비유처럼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는 줄만 알았는데,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머리 위로 물벼락처럼 쏟아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문장이 마음에 콕 박혔다.
왜냐하면 요즘의 나는 그 물벼락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머리, 기억력 위로 쏟아졌고
얼마 전엔 눈, 시력 위로 또 한 번 쏟아졌으며
지금은 오른팔, 일상의 움직임 위로 거침없이 쏟아졌다.

예전에 친한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옷을 갈아입다 팔이 불편해 옷에 갇혀 버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 웃다가 이내 서글픔이 밀려와 웃음이 눈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아 코끝이 찡해졌었다.
그리고 요즘, 내 오른팔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그때 들었던 ‘옷에 갇힌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세월의 물벼락.
언제부턴가 나도 그 한복판에 서 있다.
가장 답답한 것은 대화를 하다가 말하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들이다.
갑자기 머릿속에 정전이라도 난 듯, 불이 꺼지며 깜깜해진다. 아무리 기억의 어딘가를 더듬어도, 표현해야 할 단어는 주름진 뇌의 한 구석에 꼭 숨어버린 것만 같다.
그럴 때면 마치 퀴즈를 내듯 단서 몇 개를 더듬더듬 내놓고, 누군가 내가 흘린 조각들을 맞춰주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늘 “아…” 하고 탄식을 토해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단어들.
약이 오르다가도 금세 화가 나고, 그러다 문득 우울해진다.

무엇보다 큰딸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엄마, 아까 말했잖아!” 하고 타박할 때면 내 노화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자존감이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해가 갈수록, 달이 넘어갈수록, 하루가 저물 때마다
왜 시간이 이토록 아깝게 느껴질까.
손으로 움켜쥐고선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내 시간들.
그 시간이 물벼락처럼 쏟아지는 동안
나는 그 속에서 조용히, 묵묵히 서 있다.

뭐, 피할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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