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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성훈 Jun 08. 2024

예의차리다보면 나중에 아무도 안남게 돼

영화 <백탑지광>을 보고

여백이 가득한 영화였다. 중년의 음식 평론가 구원통은 예의를 차리다 이혼을 하고, 새로운 인연이 떠나는 것을 지켜만 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의 사랑이었을까? 긴장감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아니기에 종종 자고 깼다. 느슨한 이야기 전개로 생긴 여백에 나의 상황을 대입해봤다. 나또한 예의를 차리느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용기내지 못하고 마음을 마음 속으로 묻어야만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미건조한 일상과 어떤 의무들과 가끔 찾아오는 일상의 행복들이다.


구원통은 인생이라는 연극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누나의 남동생으로서, 아빠의 아들로서, 딸의 아빠로서, 친구들의 친구로서, 젊은 여자의 지나가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혼한 아내의 전남편으로서. 생의 시간이 깊어지며 연기해야 하는 역할의 개수도 많아진다. 하지만 그 무엇도 쉬운 건 없다. 그렇게 살아가며 때론 원망했던 아버지처럼 되어간다.


영화의 효용은 무엇일까. “왜 영화를 보지?”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지금 내 마음은 어떠한지. 백탑지광을 통해서는 새로운 인연에 용기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던 스스로를 발견한다. 상대를 배려하며, 결국 한 발짝도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멀어져가는 인연을 바라본다. 영화는 강제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과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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