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옷을 사게 되었나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by 시코밀

주방 싱크대와 조리대를 정리하고 나서 우선 급한 내 옷부터 정리해야 했다. 좁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의 많은 옷들은 안방 옷장에 다 걸리지 못하고 바지들은 그냥 접혀서 옷장 아랫부분에 마구잡이로 처박혀 있었고, 겨울 니트들은 리빙박스나 천으로 된 정리함에 접혀서 아무렇게나 담겨서 있었다. 날씨도 점점 추워지니 겨울 옷 정리 미리 하는 셈 치고 정리를 시작해본다. 마음이 약간 들떴다. 나도 몰랐는데 가끔 보면 나는 옷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예쁜 옷 속의 나 자신일지도.


사회초년생일 때는 돈이 아까워서 옷을 못 사고 결혼하고 나서는 대출금 갚느라고 옷을 사지 못했다. 그리고 옷을 사야 할 필요도 많이 느끼질 못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던지 많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의 자아가 더 건강했을지도! 그 당시엔 그냥 필요한 옷을 그때그때 사 입고 유행이나 트렌드 이런 것도 따질 줄도 몰랐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친정집엘 갔는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아빠는 차마 내게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못하셨고 엄마에게 '큰애는 왜 맨날 늘어진 티셔츠만 입고 오냐?"라고 했다는 것이다. 늘어진 티셔츠라니! 내가? 별로 안 늘어졌는데! 오랜만에 친정에 오는 큰 딸이 항상 초라한 모습이어서 많이 안타까웠는지 늘 과묵하시던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 내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다른 모든 애엄마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도 그때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것에 대한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가 있었다. 그 시기에 나의 아이에 대한 높은 집중 때문에 남편과도 가장 많이 싸운 기억이 난다. 그때는 어딘가에 열정을 쏟을 때 나 자신에게도 한 주먹의 관심과 애정을 남길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이후로 나는 옷을 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남이 봤을 때 이상하게 입고 다니고 싶진 않았고 이왕이면 센스 있게 옷 잘 입는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다시 회사로 복직을 했을 때는 아이에 대한 나의 모든 시선이 이제 내 모습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나 보다. 주로 집 앞 백화점에 가서 예산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위아래 세트로 겉옷까지 몽땅 사서 입었다. 코디도 할 줄 몰랐고 백화점 직원이 이런 치마에 요런 블라우스가 어울린다고 추천을 해주면 고민 안 하고 그대로 입고 다니기도 했다. 주로 가는 매장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때는 정장에 구두 차림이라 차라리 코디가 편했다. 늘 치마 정장에 힐이나 펌프스가 주된 나의 착장이 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교복처럼 같은 치마에 블라우스만 돌려서 갈아입을 때도 있었다. 상의만 다르게 입어도 매일 다르게 입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때 나름 나도 패셔니스타란 말을 들었다. 아마 늘 정장 차림이라서 남들에게는 깔끔한 이미지를 주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힐을 신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출퇴근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2013년 겨울에 여의도 사업소로 발령을 받아 이동하게 된다.


집이 영등포, 사무실은 여의도! 점심시간에 여의도 IFC 몰에 들러한 벌 사 오기는 일도 아니었다. 퇴근 후에는 영등포역에서 내리면 바로 백화점에 지하상가에 나를 유혹하는 곳은 넘쳐났다. 게다가 우리 사업소에는 예하 사업소를 총괄하는 1차 사업소였고 여직원들의 수도 많았는데 옷차림에 유독 신경이 쓰였다. 사내에 교육이나 회의 등 행사도 많았고 사장님도 자주 오셔서 아무거나 막 입을 수가 없었다.(물론 나의 핑계였을지도) 그 당시에 자연스럽게 옷을 많이 산 것 같다. 퇴근길에 늘 백화점 들리기는 참새가 방앗간 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옷만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한 번도 신지 못한 8센티 힐의 부츠도 10년 만에 버렸다. 아 이 몹쓸 못 버리는 병!


그리고 재작년엔 강남 쪽 사무실로 이동했다. 문제는 또 발생했다. 여의도에서도 주로 정장을 입었는데 강남 사업소로 오면서 주로 운동화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힐을 신고 지하철을 타기란 아줌마에겐 무리다. 그 전에는 운전도 가끔 했지만 이동후에는 출퇴근길이 너무 막혀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코디에도 변화를 줘야 했다. H라인 스커트에 어쩐지 운동화는 어울리지 않았고 나의 패션센스는 나아지질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무실도 너무 따뜻해서 더 이상 두꺼운 니트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사실! 여의도 사업소는 겨울이면 한강 바람이 세기도 했고 사옥이 노후돼서 추웠었다. 하지만 새 사무실은 중앙난방 시스템이라 그런지 너무나 난방이 잘 되었다. 얇은 니트를 다시 여러 벌 샀다. 늘 옷을 사야 할 이유는 넘쳐났다. 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사진: 이탈리아 남부 해안도시에서 직접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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