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는 남의 일

정리 유전자가 내게도?

by 시코밀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웬 정리람! 하고 남편은 말했다. 내가 아이방과 거실 그리고 부엌 베란다 쪽 정리가 시급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생전 정리와는 담쌓은 내가 결연한 의지를 보이니 어이가 없나 보다. 하긴 그동안 정리는 남편 담당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좁아진 평수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뭔가 비우고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거실은 복잡했고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거슬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고양이 두 마리에게도 동물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야 정리와 홈 스타일링이란 것을 해야겠다고 실천하고자 마음먹은 것뿐이다.


한번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집안 모든 것이 정리할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집안 가구 배치나 정리정돈은 나보다 훨씬 정리 유전자를 타고난?! 남편의 몫이었다. 남편은 늘 치우고 정리하고 나는 늘 어지르고 한쪽으로 밀어놓는 쪽이었다. 같은 대학을 나왔던 우리 부부는 대학 도서관의 사물함을 같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내가 책을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았다가 다음 날 다시 열어보면 남편이 가지런히 정리를 해놓았었다.


살면서 남편은 아이의 책 정리 담당이 되었다. 전집은 늘 1번부터 순서대로 꽂아 놓길 좋아했었다. 2-3년마다 아이가 다 읽은 책은 중고로 팔고 새 전집을 사들이는 것도 남편이 잘하는 일이었다. 아이를 뒤꽁무니를 쫒아다니면서 치우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남편 몫이었다. 벽에 그림이라도 그릴까 봐 대형 보드를 사준 사람도 애 아빠다.


남편이 그동안 아이방 옷 정리며 책장정리며 한 번씩 넘쳐나는 쓰레기들을 치우곤 했었다. 올해 아이는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이 방에서는 초등학생 때 가지고 놀던 물건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편에게 아이방도 확 정리를 해야겠다고 했더니 아이는 은근 기대하는 눈치인지 방 정리에 대해 자기와 미리 상의를 해달라고 내게 주문하다. 달라진 주방 모습에 일단 엄마를 믿어보기로 한 걸까.


이제야 알겠다. 그저 나는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관심 가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고 그저 모른다고 치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리가 주는 가슴 후련함을, 공간의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을, 물건을 비움으로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음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한 번의 좋은 경험은 꼭 필요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