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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Sep 20. 2023

엊그제만 같아요

시어머니는 가수이셨다



지잉 -

턴테이블이 돌아갔다. 나의 눈이 커졌다. 남편의 눈은 더 커졌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턴테이블 위에서 새까만 레코드판이 돌아간다. 핀이 저절로 움직여 레코드판의 가장자리부터 돌기 시작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와!!'

우리의 탄성과 함께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풍성한 소리는 아니었다. 남편이 턴테이블에 급하게 연결한 스피커의 성능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도착한 시어머님의 목소리를 감상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어머님이 가수이셨다는 말은 결혼하고 나서 자주 들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노래를 들은 적도, 어머님이 노래를 하시는 모습을 본적도 없었다. 다시는 그 때처럼 노래할 수 없다고 쓸쓸해하시던 기억만 난다.

시댁에는 어머님의 노래가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나 앨범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친척집에서 어머님의 레코트판이 발견된 것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남편이 아는 어머님의 목소리도, 내가 알던 어머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가끔 방송에 나오는 흘러간 옛날 노래 바로 그 자체였다.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에서 어머님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리 들어도 우리 어머님이 그려지지 않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뭐야 우리 엄마 목소리랑 완전 다른데?"

 남편은 원하는 스피커에 연결할 케이블이 없다며 컴퓨터 검색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급하게 틀어보느라 바닥에 놓아둔 턴테이블 옆에 주저앉았다. 레코드 커버를 보니 성한 곳이 한 구석도 없는 모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빛에 바래고 낡아서 흐물거리면서 흘러간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커버 앞에는 사진이 있었다.

 20대의 앳된 어머님이 아련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버 뒷면에는 목차와 가사가 적혀 있었다. 가사를 읽으며 노래를 들으니 어머님이 보이다가도 사라졌다. 타이틀 제목은 ‘엊그제만 같아요 나의 추억‘


 처음 인사 갔을 때 만났던 어머님이 떠올랐다. 액세서리 하나도 없이 옅은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입었다. 그게 당시 수험생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치장이었다. 어머님은 퍼베스트를 두른 가죽재킷에 가죽부츠를 신고 오셨다. 양손에는 큼지막한 은반지가 두세 개씩 끼워져 있었고, 치렁치렁한 귀걸이와 목걸이, 거기에 머리에 얹어진 페도라까지.


 표정과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자격지심인지 나는 어머님의 반지에 한 대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님은 처음 만나는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최고의 격식을 차리신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님만의 예절이었다. 물론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어머님의 치장에 나는 절로 기가 죽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어머님은 보통의 시어머니는 절대 아니셨다. 명절에는 함께 맥주를 마셨고 음악방송을 보았다.거미나 악뮤같은 요즘 가수들을 더 좋아하셨다. 평범하고 고루한 것을 싫어하는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어쩐지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어려워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 아니던가.


 어머님이 돌아가시진지 벌써 일년이 지났다. 어머님 생전에 이 레코드를 들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예전에 녹음한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하셨는데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싼 턴테이블과 좋은 스피커를 대령해도 어머님은 계시지 않고 어머님의 노래만 남았다. 좀더 편하게 대해드릴걸, 더 잘해드릴 걸. 지금이라도 시댁에 전화 하면 어머님 목소리 들릴 것만 같다. 계속 바쁜 척만 하는 남편 대신 나만 혼자 젖어들어가는 눈을 닦았다.


어머님 계시던 시절이 엊그제만 같다. 어머님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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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을 수필 형식으로 다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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