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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Oct 13. 2023

언제나 새것일 수는 없잖아요

남편도 태블릿도


“엄마, 제가 모시러 갈까요?”

 사실 빈말이었다. 정말로 오라고 하실지 몰랐다. 그런데 엄마는 냉큼 어서 오라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짐도 무겁고 추적추적 비 까지 내리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계신 곳은 차로 30분은 가야하는 곳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던 남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전화를 끊자,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운 식탁 위에 정적이 흘렀다. 모처럼 일요일에 대청소를 하고 나서 그제야 한숨 돌리는 참이었다.


 결국 차 열쇠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선 것은 나였다. 정말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빈말로도 대신 가겠다고 하지 않는 남편이 조금 얄미웠다. 만약 남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도 말리고 내가 나왔을 것이다. 남편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굳이 엄마를 모시러 가는 내가 이해되지도 않는 눈치였다. 신혼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은 아직 오후 3시도 안되었는데 날이 흐리니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괜히 혼자 씩씩 거리느라 몇 달 만에 쏟아지는 비가 반가울 틈도 없었다. 젖은 도로의 차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생각에 운전대를 잡은 손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서두르다가 길을 잘못 들어 오히려 한참 돌아가고 말았다. 괜히 남편이 더 미워졌다.


 엄마는 올해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오늘은 엄마의 첫 입학식 날이었다.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니 교과서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나오셨다. 처음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 반장선거를 했던 이야기를 재잘재잘 풀어놓는 엄마를 보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비도 멈추고 갈 때보다는 수월하게 돌아왔다. 엄마 집으로 가서 교과서 정리를 도와드리기로 했다.


 엄마는 지난달에 방송통신 중학교 3년 과정을 졸업하셨다. 한 달에 2번은 출석하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방식이다. 지난 3년간 엄마 집 거실벽장은 책장이 되어 있었다. 정리를 도와드리다가 문득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태블릿PC였다.


 한창 연애할 때 남편이 사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사줬지만, 연애를 더 열심히 했다. 그 후에 임신 축하 선물로 남편은 더 크고, 비싼 태블릿PC를 사주었다. 그래서 낡은 태블릿은 공부를 시작한 엄마에게 드린 것이다. 엄마는 노트북은 곧잘 사용하셨지만 태블릿은 영 사용하지를 못하셨다. 벽장에 책과 함께 있던 것을 이제야 써보겠다고 꺼내신 것이다.


 엄마에게 태블릿 사용법을 다시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신형은 아니지만 태블릿은 쌩쌩 잘 돌아갔다. 엄마의 강의 수강에도 문제가 없어보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태블릿을 보자 아직은 푸릇한 시절이 떠올랐다. 처음 이 태블릿을 선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도 기억났다. 이 작은 태블릿을 얼마나 잘 사용했는지도 생각났다. 남편에게 콩깍지가 씌어 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너무 낡아서 벗겨 버렸다면서 낡은 태블릿 케이스를 흔들었다. 케이스를 벗겨낸 태블릿은 새것처럼 깨끗하게 보였다. 아직은 한참 더 쓸 수 있었는데 왜 태블릿을 새로 샀지? 임신 축하 선물로 명품백 대신 새 태블릿을 고른 것은 나였다. 언니들을 내가 엉뚱하다고 했다. 내 능력에 넘치는 고급사양으로 사서,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있는 아이패드가 아직도 집에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구형의 모델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도 기계처럼 언제나 새 것으로 갈아 치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과의 애정과 사랑도 새 태블릿PC처럼 언제나 새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 집에 있는 구형 태블릿처럼, 아직은 쓸만하지 않을까. 집으로 가는 길, 집을 나설 때 쌓여있던 앙금을 털어내었다. 봄비가 내리는 삼월이었다. (2023.06 동산문학-영광문학 간담회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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