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준비도 안 한 애가 뽑혔어요.

시간만 낭비했어.

여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우리 아이들은 부쩍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처음엔 그 말이 다소 귀엽게 느껴져 그냥 웃고 넘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과 없는 일에 시간을 들일 때 마다 녀석들은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산다. "시간 아깝다." "시간 낭비했다"


귀엽게 느껴진 말들이, '저 녀석들이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서 그런가?' '혹시 시간에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닌가' '과정이 아닌 결과만 중요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르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시간은 버리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말을 해 주고는 한다.

메뚜기를 잡으러 갔다 헛탕 친 둘째가 "아, 괜히 왔어 시간 아깝게!"라며 푸념하면

"괜히 라는 것은 없어, 시간이 왜 아까워? 엄마는 너랑 이곳에 와서 너무 좋았는데?!"

순간 순발력이 좋은 둘째가 "그럼 '괜히'라는 말은 왜 생겼는데요?!"라고 말하면 "괜한 것은 없다고 알려주려고 생긴 거 아닐까?" 라고 지지 않고 이야기 해 주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6학년이 된 큰 아이에게 슬며시 반장 선거에 나가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처음엔 싫다고 하던 아이가 "이제 초등학생 마지막이니까"하는 나의 말에 그럼 한번 나가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연설문을 준비하며 점점 의욕적으로 변하는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며칠 전부터 연설문을 쓰고 몇 번을 연설문을 고쳐 읽으며 연습했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발음이 또렷해 지며 손동작에 힘이 들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내심 뿌듯하고 기뻤다.


당선이 아니라 출전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몇 번이고 일러주어도 엄마인 나부터 '혹시?'하는 기대가 나잇살처럼 천천히 불어갔다. 선거 날 바깥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이의 신발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 오늘이구나' 하는 마음에 크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들어가니 대답은 않고 밖으로 터벅터벅 나오던 큰 아이가 볼 멘 소리로


엄마, 나보다 발표 준비도 안하고 그냥 뽑아 달라는 아이가 당선됐어요

속상한 아이가 항의 하듯 말을 내뱉는다. 의기소침해진 아이를 보니 마음이 무겁지만 애써 세상 쿨한 엄마처럼 "그래? 그보다 너 연설은 연습처럼 잘 했니?" 했더니 녀석은 "네.."

"반장은 누가 됐니?" "작년에 반장 했던 애가 됐어요"

아이는 별 다른 말은 덧붙이진 않았지만 세상 상심한 표정이다.


"우리 아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긴장했을텐데 그 연설문을 연습처럼 한 것은 정말 대단한거야"

그래봐야 당선도 되지 않았는데요..하는 표정의 아이는 내 칭찬마저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랴부랴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옆에 있는 몽당연필 하나를 잡았다. (지금도 어디서 이런 순발력이 나왔는지 믿겨지지 않는다ㅋㅋ)

"아들, 이 몽당연필 보면서 무슨 생각 들어? 엄마는 이 몽당연필을 볼 때마다 정말로 흐믓해. 왜냐하면 이 연필은 시간이 쌓였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니까, 이번에 당선된 친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반장선거에 대한 시간을 쌓아 간 거야. 너는 이제 막 시간을 쌓기 시작 한 것이고.... 너도 이제 시간을 쌓으면 돼. 2학기 때도 도전해 보고 중학교 때도 도전해 보면서 시간을 쌓아 가는 거지. 이 연필이 이렇게 짧아지도록 수학 문제를 풀었던 것처럼"


녀석의 눈빛에 조금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순박력(순발력+박력)있는 엄마답게 아이를 끌어 당겨 안으며 "엄마 진짜 놀랐다. 처음인데 준비도 잘하고 연설도 실수 없이 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 해 진심으로" 손을 들어 내 목을 함께 끌어 안아주는 아이를 보며, 화룡점정 마침표를 찍어 줄 타이밍이라는 것을 느낀다.


오늘 저녁 맛있는 거 먹으면서 축하하자!

며칠 전 어느 기사에서 읽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피부색이 달라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놀림을 받는 다는 아이에게 다르다는 것은 특별함이고 축하할 일이라고, 나 또한 다른 의미에서 큰 아이의 노력의 시간을 축하하는 의미였다. 먹는 것에 제법 진심인 녀석은 좀전의 낙선은 까맣게 잊은 듯, "아 그러면 bhc치킨 시킬까요? 오늘 학원 가는 날이니까, 좀 일찍?" 태세 전환이 매우 빠른 아이가 귀여워 크게 웃으며 "오케이!"하며 시원스럽게 대답해 줬다.


기분 좋게 일어서는 아이가 한 마디 했다.


엄마, 근데 반장선거에 나가는 게 별 건 아니더라고요.



오케이! 바로 그거야, 별 거 아니라는 걸 느낀 거! 물개 박수를 치며,

"오늘 치킨은 두 마리 시키자! 뿌링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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