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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Sep 22. 2015

역설의 나라, 영국을 만나다

딸의 이삿짐 때문에 여름휴가를 영국에서

역설의 나라, 영국을 만나다     

딸의 이삿짐 때문에 여름휴가를 영국에서       

   


독일 이야기를 쓰고 나니까 영국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영국에 대한 내 어릴 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신사들은 흰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있다. 중절모자도 쓰고 우산을 팔에 걸고 있는 신사의 모습을 책에서 보았다. 그 신사는 약자를 돕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도 묘사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놀던 공이 잔디밭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 신사는 말없이 자신의 지팡이로 그 공을 꺼내 주는 스토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렇게 말없이 약자를 돕는 신사의 나라였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같은 유럽인데도 이웃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인들은 기름 때가 묻는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말없이 일만 하는 우직함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약간 멍청함 같은 게 있다.      


이에 비해 영국인들은 양복을 쫙 빼입고 먼지를 톡톡 털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세련됨이 있다고 한다. 나쁘게 말하면, 말만 앞세우는 얌체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독일에 살면서 여러 차례 들었다. 나도 영국인에 대한 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이 그래도 꽤 이름 있는 대학(하긴 이름 없는 대학이 어디 있으랴만)을 입학해서 첫 학기를 다녀보더니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유학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유학을 보낼 형편은 됐다.


그렇지만 약속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모든 유학비용은 보내주겠다. 나중에 돈 벌면  그때 갚아라. 그동안의 이자는 받지 않겠다.” 이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가 죽기 전까지 이 약속은 유효할 것이다. 이런 약속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독일에 살 때부터 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된 성인으로 대우한다. 대학생이 되면 완전히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필요한 돈은 부모나 정부로부터 빌려서 쓴다. 그리고 나중에 갚는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하기로 어려서부터 약속을 해왔다.     



 

여기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잠시 생각해보자.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기르는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그때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물론 우리 둘 다 교사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기초적으로 교육학 공부를 한 셈이지만, 그게 실생활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 자기 성질대로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부가 강조한 점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일관되게 행동했던 것을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정리해보자면,    

 

첫째, 자신의 삶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인간이 되라.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밥 먹고 신발 신는 것조차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떠먹여주거나 신발을 신겨주지 않았으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먹었고, 먹기 싫다면 밥상을 치웠다. 신발을 잘못 신어 불편하면 스스로 똑바로 신는 법을 배워야 했다.    
둘째, 공부는 자신의 능력껏 하라. 공부에 과욕을 부리지 마라. 학교 다닐 때 과외를 하고 싶다면 보내주었을 뿐, 억지로 보낸 적은 없다. 그러니 과외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다. 자기 능력보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리면 자기 자신도 불행해지고 사회도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셋째, 예쁜 것들/잘생긴 것들을 조심하라. 이런 것들은 반드시 그 값을 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예쁜 것들/잘생긴 것들에게 평생 그 값을 지불하면서 살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멀리하라. 다시 말하면,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준 교훈의 핵심은, 몸뚱이로 승부 걸 생각을 말고 머리를 쓰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각자 알아서 살아라, 뭐 그런 얘기다. 이렇게 일관된 생각으로 아이들과 살아왔는데, 막상 딸이 영국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최근 몇 년 사이에 나타낸 아내의 반응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내의 숨겨진 보수성이 폭발했던 스토리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     




아무튼 딸은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의 한 학기를 포기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영국에 별 관심이 없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런던에서 취직했다고 했을 때도 취직했나 보다 그랬다. 얼마 후 한국으로 귀국하리라 기대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던 2007년 여름, 휴가를 영국에서 보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영국을 찾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히드로 공항을 몇 차례 밟은 적은 있지만,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유학시절 대륙의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는데도, 영국만큼은 가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차를 배에 싣고 건너야 하는 것과 운전대가 달라서 귀찮은 정도가 걸림돌이었을 뿐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할 형편은 못 됐다. 이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밖에도 굳이 구실을 갖다 붙이자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앵글로색슨 모델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 인식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에든버러로 올라갔다. 딸이 이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만 해도 에든버러가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 잘 몰랐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왜 그토록 갈등하고 전쟁을 벌였는지도 잘 몰랐다. 그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늘 일에 파묻혀 살았다.     


딸은 에든버러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2년 후에 다시 찾아가 에든버러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여러 도시와 하이랜드까지 보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2007년 여름 에든버러 시내에서
2007년 여름 에든버러 시내에서... 스코틀랜드의 전통악기 백파이프(bagpipe)
2007년  여름 에든버러 시내에서


에든버러에 머무는 동안 마침 프린지 페스티벌(Edinburgh Fringe Festival)이 열렸다. 에든버러 성에서의 공연은 모두들 일어서서 장엄한 영국 국가(British National Anthem)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영국 국가를 처음으로 온전히 들었다. 내용이 놀랍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내용 전체를 들으면 정말 기가 막힌다. 백성들이 여왕을 섬기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가 매우 발달한 나라라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국이 역설의 나라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에든버러 성에서 군악대 공연, 2007년 8월 이날 우리 두번째 뒷자리에는 아마도 가수 양희은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딸은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봉고만한 이삿짐 차를 빌려서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을 해야 했다. 런던까지는 보통 12시간 이상 걸린다. 짐을 싣고 딸과 아내를 앞좌석에 태우고 아침 9시에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인 런던에서 이삿짐 차를 끌고 카나리 워프(Canary Wharf)까지 실수 없이 도착해야 했다.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지 않은 때였다. 찾아가야 할 모든 도로명을 거의 일주일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도로명을 순서대로 외우고 또 외우고... 딱 한번 실수를 했다. 런던에 들어서서 템즈강을 건너는 블랙월 터널(Blackwall Tennel)로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좌측으로 빠졌어야 했는데 그 출구를 놓쳐버린 것이다. 다시 돌아서 런던의 카나리 워프(Canary Wharf)에 도착했다. 14시간을 길에서 보냈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짐을 풀 수 있었다. 2007년 8월 2일이었다.     

 



그 후 나는 몇 가지를 더 관찰했다. 과연 영국은 내가 어릴 적 상상했던 대로, 말없이 약자를 돕는 신사의 나라인가 아니면 독일인들이 말하는 대로 말만 많은 얌체들의 나라인가?      


내 결론은 이렇다. 영국은 말도 많지만 약자들도 돕는 신사의 나라라는 것이다. 요즘 난민을 받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영국 정치인들을 보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정치인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도 영국인들이다.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을 노동당 당수로 뽑은 사람들도 영국인 노동자들이다. 말도 많지만 약자도 도우려는 신사들도 꽤 있는 국가라는 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역설의 나라로 보인다. 


나는 영국에 가면 늘 영국인들을 째려본다. 혹시나 얌체들이 많이 살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중국 여행객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계단에서 쩔쩔맬 때, 어김없이 영국 신사가 나타나 돕는 모습을 본다. 런던의 복잡한 거리에서 지도를 보면서 헤매고 있는 나그네를 볼 때, 어김없이 영국 신사가 나타나 도와준다. 적어도 평범한 영국인들은 그랬다.


약자와 나그네를 돕는 모습에서 신사의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영국인들이 말 많은 것도 당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말없이 세계를 제패하고 영연방(The Commonwealth)으로 묶어낼 수 있겠는가? 영국은 말없는 신사의 나라가 아니라 말도 많은 신사의 나라다. 진정으로 신사라면 말없이 도와야 하는데, 말도 많은 것을 보니 역설의 나라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스코틀랜드, 웨일스, Lake District, Peak District를 가보면 배울 것이 많다. 수백 년도 넘는 건물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도 그 주변은 아주 현대적이다. 지금 딸이 살고 있는 집도 17세기에 지어진 왕립무기고(Royal Arsenal)다. 겉에서 보면 옛 모습 그대로인데, 안에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었다. 영국인들은 건물에 역사가 서려 있는 것을 좋아한다. 동네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어떤 전쟁을 위해 어떤 무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영국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설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여름, 왕립무기고 건물들. 내부를 현대적으로 개조했다.
2012년 여름, 왕립무기고 건물들. 내부를 현대적으로 개조했다.


인생이란, 영국인들처럼 이런 역설적 상황을 얼마나 잘 조화시키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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