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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Oct 08. 2018

직무기술서가 작동하지 않는 나라

직권남용죄가 아니라면 강요죄라도

[직무기술서가 작동하지 않는 나라에서 직권남용과 강요죄는 성립할 수 없는가?]


이명박·김기춘·최경환 1 심서 "부당한 요구지만, 직권은 아냐" 줄줄이 무죄가 선고되었다.


생각해보자. 이명박, 김기춘, 최경환, 양승태 같은 또라이들이 타인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 행위가 그들이 맡고 있던 직무권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 치자. 인사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 또는 해코지를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 영향력의 범위 안에 있는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한 것은 합리적인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인사조직론적 관점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명박·김기춘·최경환에게 무죄를 내린 것은 매우 불합리해 보인다. 오히려 더 큰 범죄행위처럼 생각된다. 왜냐? 자신의 직무권한 범위 내에서 타인에게 불합리한 지시명령 또는 부탁을 한 것도 큰 잘못인데, 직무권한을 넘어서까지 타인에게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사보복이나 해코지가 두려워 힘 있는 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 동안 자의든 타의든 일부 몰지각한 판사들이 그렇게 재판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사법부의 흑역사"를 잘 알고 있다.


따져보자. 우리나라에는 각 직무의 권한과 책임을 명시해놓은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가 없거나 있더라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의 조직에는 권한과 책임을 기술한 직무기술서가 작동하기 때문에 직무권한의 범위를 누구라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직무권한의 범위를 넘어서는 월권행위를 결코 할 수 없다. 월권행위를 한 것 자체가 불법이자 위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의 조직관리이론에서는 권한과 책임이 큰 직무일수록 직무기술의 명확성은 더욱 엄격하다. 


심지어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독일 연방 총리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직무수행범위와 그 방법을 명확히 결정해두기까지 했다. 독일 기본법(헌법) 65조에는 네 개의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Der Bundeskanzler bestimmt die Richtlinien der Politik und trägt dafür die Verantwortung. 연방총리는 정책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것을 총리가 연방정부의 정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결정할 수 있는 권능, 즉 Richtlinienkompetenz라고 한다.)


Innerhalb dieser Richtlinien leitet jeder Bundesminister seinen Geschäftsbereich selbständig und unter eigener Verantwortung. 각 연방장관은 총리가 정한 가이드라인 내에서 자신의 소관분야를 이끌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것을 연방장관들이 개별 사안들에 대해 총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정책 집행을 할 수 있는 소관업무의 원칙, 즉 Ressortprinzip이라 한다.)


Über Meinungsverschiedenheiten zwischen den Bundesministern entscheidet die Bundesregierung. 연방장관들 사이의 견해차이가 발생할 경우 연방정부가 결정한다. (이것을 연방총리와 연방장관들이 반드시 토론을 통해 합의를 거치도록 하는 합의의 원칙, 즉 Kollegialprinzip이라 한다.)


Der Bundeskanzler leitet ihre Geschäfte nach einer von der Bundesregierung beschlossenen und vom Bundespräsidenten genehmigten Geschäftsordnung. 연방총리는 연방정부와 연방대통령이 승인한 정책 집행지침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다.


이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행위도 위헌이요 불법이 된다. 이런 원칙들은 주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조직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지켜진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직무기술서가 작동하지 않아 직무의 권한과 책임이 불명확한 우리나라에서 직무의 권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직권남용죄나 강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매우 낙후된 법률체계 때문으로 보인다. 무소불위한 절대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찍어누르는 행위를 직권남용이나 강요로 다룰 수 없다면 말이 안 된다.


이런 현실과 낙후된 법률체계를 잘 이해해서 판사들이라도 현실인식의 지평이 넓어야 하는데, 그것도 별로 기대할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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