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혁신이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렵습니다.
경상남도 도정혁신을 위한 〈인사혁신 방향〉에 대한 토론자료
우선 〈인사혁신 방향〉이라는 발표자료를 사전에 보내주셔서 꼼꼼히 볼 수 있도록 해주신 도정혁신 보좌관께 감사드립니다. 발표자료에 담긴 내용과 방향으로 경상남도의 인사혁신이 이루어진다면, 경남은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와 같은 게르만 모형(German Model)을 활용하는 국가 수준의 행정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발표자료에 담긴 인사 철학과 원칙, 그리고 그 실현방법론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이 실현된다면, 경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인사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발표자료를 보면 누구나 경상남도가 인사에 관한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에서 선진적인 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독일 경영학 중에서도 인사조직 분야를 전공하고, 20년간 한국은행의 인사조직부문에서 일하면서 마지막 3년간은 조직개혁업무의 실무책임자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한은을 떠난 후 여러 기업체에서 컨설팅·자문과 교육을 해온 경험을 통해 얻은 소중한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정이든 경영이든 효율성과 창의성을 향상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사혁신이라는 점에는 모두들 동의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실현하기 어려운 것도 인사혁신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사혁신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식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채용, 승진, 보직이동, 보상, 공직자의 역할과 책임 규정 등의 핵심적인 인사업무가 모든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사혁신이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렵습니다.
이번 발표자료에서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치철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민 중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도록 서로 연대(solidarity)하고 보충(subsidiarity)해주는 원리를 실현하고, 각종 행정 이슈에 대한 현장에서의 대화(dialogue)와 토론(discussion)을 통한 도민의 필요를 수렴하고, 합의(consensus)에 의해 의사결정(decision)하는 등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발표자료에서 역력히 보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면, 도정을 책임지고 있는 공직자들이 먼저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가치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우선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공직자들의 삶도 그 질적 수준이 높아지고, 나아가 도민들의 삶 또한 질적 수준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인사혁신은 공직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라는 점에서 초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불편한 점을 극복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인사혁신은 단순한 제도개선과 같이 몇 가지 행정문서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상태,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 등 정신구조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직자들에 대한 교육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인사혁신을 실천하려는 공직자들의 강력한 의지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의 인사제도는, 공공부문의 인사행정이든 민간부문의 인사관리든,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인사제도를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졸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짓》, 21세기북스 2014년 출간, 192쪽 이하 참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의사결정방식인데, 하급자가 품의서에 기안해서 상급자에게 올려서 결재를 받고, 그 상급자는 또 자신의 상급자에게 올려 결재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본 에도막부시대 쇼군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의사결정방식이었고, 일제 군국주의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그대로 이식된 제도입니다.
품의제도(Ringi-seido)라고 불리는 이 의사결정방식은 지구 상에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식 의사결정방식의 유효기간은 1997년 외환위기까지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 국가부도 사태를 맞게 했던 행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깊은 성찰과 함께 근본적인 혁신을 단행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물론 당시 인사제도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검찰제도와 사법제도 또한 제때에 혁신했었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미적거리다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제도적 적폐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아픔을 경험해야 했고, 결국에는 사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혁신의 기회가 왔을 때 불합리한 제도적 장치들을 확실하게 혁신하지 않으면, 우리의 속담처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기 어려운 불행한 사태를 겪게 됩니다.)
아무튼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미처 혁신을 생각할 틈도 없이 IMF의 관리체제로 들어감으로써 앵글로색슨 모형(Anglo-saxon Model)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군국주의적인 인사제도에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개인별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로 덧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이 지나면서 표피적으로는 기술발전을 이루어 경제가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에 의해 잠식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회분위기에 따라 공공부문의 행정조직 또한 앵글로색슨 모형의 영향을 받아 BSC와 같은 스코어로 평가함으로써 공직자들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내몰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졌고, 이제는 1:99의 사회가 되어 양극화가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방해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일본 군국주의적 권위주의 조직문화에다 앵글로색슨 모형의 승자독식 정신으로 무장한 개인들이 최악의 조직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숫자로도 명확합니다. 한국은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대략 2,100시간 정도인데, 독일은 1,300시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독일인들보다 대략 800시간 더 일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일 년에 5개월을 더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 일합니다. 이것이 결코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인당 노동생산성은 독일에 비하여 80% 수준에 머물러있습니다.(2017년도 OECD 통계) 독일인이 한국인보다 더 유능하거나 똑똑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일해 본 저의 경험에 의하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똑똑함과 부지런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보다 나으면 더 낫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통계수치는 한국인들이 일하는 노동환경조건이 근본적으로 잘못 설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개선해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중앙정부에 대한 인사혁신의 일환으로 김대중 정부는 중앙인사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치하여 인사혁신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은행의 조직개혁 실무책임자로 일하면서 초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광웅 교수의 정책자문관으로 정부를 돕기도 했습니다. 고위공무원단을 설치하여 역량중심의 선발제도를 만들고 직무분석을 통해 고위직 담당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역할인 성과책임(accountability)을 규명하여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정부가 바뀌면서 당초의 정신과 의도는 유야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아예 중앙인사위원회를 해체하여 행정안전부에 흡수시켜버렸습니다.
심지어 역량진단(competency assessment)이 앵글로색슨형 시험제도와 같은 형태로 바뀌면서 고위공무원이 되려면 별도의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일을 잘하여 높은 성과를 내는 사람과 시험성적이 좋은 사람은 그 상관관계가 매우 낮습니다. 시험성적은 변별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공직자들에게 부가하는 모든 시험제도를 폐지해야 합니다.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어느 공직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수행하면서 높은 성과를 창출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누가 높은 성과를 내는 인물인지는 관리자와 동료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객관적인 관찰(기록)만으로도 얼마든지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성적이나 등급을 매겨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번 발표자료에는 ‘코칭 기반의 성과관리’로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존의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잡는 조치들이 들어있습니다. 각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발표자료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그동안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계급주의에 의한 권위주의 조직문화와 그 바탕 위에 덧씌워진 당근과 채찍으로 경쟁시키는 앵글로색슨 모형을 걷어내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에 더하여 유럽의 여러 복지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인간중심적 인사모형으로 나아가려는 경남 도청 고위공직자 여러분의 의지를 발견하고 저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과 전율이 있었습니다. 제가 경영학자로서, 경영컨설턴트로서, 때로는 경영자로서 하고 싶었던 인사혁신 모습을 이제야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번에 발표된 〈인사혁신 방향〉에 담긴 정신이 그저 행정문서로만 남지 않고, 경남도청에서부터 실현되어 중앙부처를 포함한 전국으로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랜만에 인사혁신에 관한 감동적인 내용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