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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May 03. 2019

직무권한에 대하여

조선시대로부터 탈피하고 일제강점기를 극복해야 한다

직무권한에 대하여


조직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직무설계(job design)다. 직무설계란 직무에 어떤 권한과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성과(result)를 거두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규정해 주는 작업을 말한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직무의 성과책임(accountability)을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게 없다. 일단 조직의 장(長)이 되면 그 조직의 모든 권한을 손아귀에 쥐도록 되어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명박, 박근혜가 그 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일단 장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이 맡은 직무의 성과책임(accountability)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직이 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가부장적 권위, 권한, 권력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와 통제를 위해 더욱 강화되었다. 억압과 착취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온라인판의 기사(〈KT 채용비리도 청탁자는 또 ‘면죄부’ 받나〉, 심윤지 기자, 2019.05.03)를 보자.


“직권남용 적용 기준은 까다롭다. 검찰이나 법원의 잣대가 자의적이라는 지적도 종종 받는다. 직권남용에 대한 엇갈린 판단 때문에 법망을 피한 대표적인 사례가 최경환 한국당 의원이다. 검찰은 최 의원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으로서 중소기업진흥공단에 대한 관리감독권한을 갖고 있었고, 보좌관 채용 청탁은 이를 남용한 것으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탁 실행자인 박철규 전 중진공 이사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달리, 최 의원은 1·2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이 “직원 채용은 국회의원의 직무 권한 밖”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최 의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격시키라’는 최고 수준의 압력을 가한 진술이 이례적으로 확보된 경우다. 그럼에도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며 청탁자에 대한 혐의 입증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직무의 권한과 책임(roles & responsibility)을 명확히 하고 그것이 성과책임(accountability)으로 규명되어 있어야 하며, 나아가 조직구성원들에게 불합리한 명령이나 청탁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의무(obligation to dissent)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에겐 이런 의무가 없다. 무조건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법관들의 판단도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다. 


첫째, 조선시대 사대부들을 떠받치고 있던 가부장적 권위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이 권위주의야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것에 의존하고 있다. 평소에 같이 밥 먹고 같이 토론하던 동료가 어느 날 느닷없이 인사발령이 나서 단위 조직의 장이 되면 목소리와 걸음걸이가 달라진다. 평소에 멀쩡하던 인간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인종으로 변해버린다.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리를 차지한 인간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권한과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특권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직무설계를 통해 성과책임(accountability)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 범위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 갑자기 다른 인종으로 변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모든 제도와 관행을 극복하는 것이다. 식민지배를 위해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식한 품의제도(稟議制度)*는 17세기 에도시대(江戶時代)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만들어진 의사결정방식이다. 이것은 쇼군의 권위를 한껏 높이고 사무라이 계급과 농·상민 계급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통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한반도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경력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부와 권력을 차지하지만, 자신이 완수해야 할 성과책임(accountability)이 뭔지도 모른 채 별로 하는 일없이 다음에 어느 자리를 차지해야 할지 노리면서 조직정치(organizational politics)에 몰입하게 된다. 오늘날 고위공직자들의 행태를 보라. 


* 품의제도(稟議制度, Ringi-Seido)라고 부르는 의사결정방식은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피라미드조직의 맨 말단공무원(예를 들어 실무관)이 검토하여 가장 바람직한 안(案)을 만들어 윗사람(상관)에게 "어찌 하오리까?" 물어서 수정 또는 결재를 받고, 그 상관은 다시 자신의 상관에게 수정 또는 결재를 받는 과정을 반복하여 피라미드 정점에까지 "어찌 하오리까?"하고 물어보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1980년대 초, 한국은행에서 이런 의사결정방식을 처음 접하고는 도대체 이런 방식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찾아보았는데, 이게 일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서양인들이 이런 방식을 보고는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하여, 품의제도를 upward referral system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죠.

그러니까, 최종결정권자가 스스로 검토하여 결정하면 될 일을 결정권한도 없는 아랫사람들이 줄줄이 검토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수정하는 의사결정방식을 품의제도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할 일을 여러 사람들이 들러붙어 일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큰 문제점이 있죠. 

참고로 졸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짓》 192쪽 이하를 참조하세요.     

<품의제도(稟議制度)에 대하여 추가>

위의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는 분이 있어서 다음과 같이 보충했습니다.

일하는 관행과 관련해서 서양과 한국의 근본적인 몇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양의 경우,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에 의해 각 직무의 성과책임이 명확하기 때문에 직무담당자들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헷갈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우, 직무담당자 개인이 사전에 정해진 룰에 따라 일하는 게 아니라 '직제분과규정' 등에 의해 각 부서에 배분된 업무활동 중에서 부서장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점입니다. 직무기술서가 작동하지 않아 개인의 직무가 뭔지 명확하지 않아요. 상급자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무한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입니다.     

둘째, 서양의 경우,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일부 업무를 위임할 것인지(delegation), 아니면 직무기술서로 떼어줄 것인지(empowerment)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위임이란 일시적으로 상급자의 업무부담을 줄이기 위해 하급자에게 업무를 부탁하는 것이므로 이럴 때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 처리합니다. 위임한 것은 언제라도 다시 회수할 수 있습니다. 임파워먼트는 직무내용을 직무기술서에 명시함으로써 중대한 직무내용의 변경이 있지 않는한 직무담당자의 고유한 업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delegation과 empowerment는 엄격히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의 경우, empowerment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의 장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하급자에게 위임(delegation)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우리에게는 empowerment에 해당하는 용어 자체가 아예 없으며 번역하기도 어렵습니다. empowerment란 상급자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이 하급자에게 업무처리에 관한 모든 권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경우, ‘직제분과규정’이나 ‘직무전결규정’ 같은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오던 낡은 것들을 폐기하고 직무기술서 체제로 전환했을 비로소 empowerment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규정상 모든 일을 상급자로부터 위임받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 이런 상황을 예로 들면 예전 《교육법》에는 학교장의 명에 따라 교원들이 교육활동을 하도록 규정했었습니다. 조직의 장이 모든 것을 먹어버리는 구조였죠. 이런 법의 정신은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는데, 1998년 김대중 정부에 가서야 《교육기본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학교장은 학교 내에서는 제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행은 일반 행정조직뿐만 아니라 기업에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관공서의 품의서(稟議書), 즉 기안서를 만들어서 상급자에게 결재를 받아 위로 올리는 관행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일단 조직의 장으로 올라서면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급자들을 맘껏 부려먹을 수 있는 이른바 귀족이 되기 때문에 모두들 승진에 목을 매게 하는 원흉이 됩니다. 이 기득권층이 너무나 두텁고 강고해서 제왕적 조직문화라는 못된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서양의 경우, 상급자가 자신에게 속한 의사결정을 할 때 하급자에게 의견을 묻는다든지, 정보제공을 요청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여 승인을 받아 실행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 경우 하급자의 제안이나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것이므로 상급자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직론에서는 보충(subsidiarity)의 원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급자의 지시와 명령에 따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보충(subsidiarity)의 원리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착취의 원리가 실행될 뿐입니다.     

서양의 경우에도, 앵글로색슨(영미식)모형과 게르만모형을 굳이 비교하자면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앵글로색슨모형은 조직운영방식에서 계급주의적 성격이 강한 나라들이 채용하고 있습니다.(미국이라는 나라는 출생부터 지금까지 계급주의적 사회문화를 해소한 적이 없죠) 그러나 품의서를 작성해서 결재를 받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일하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직무기술서에 의한 empowerment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CEO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영미계 기업들은 여전히 계급주의적 문화가 있어서 delegation을 많이 활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게르만모형은 패전 후 탈나치화 과정을 거치면서 임파워먼트(empowerment, Ermächtigung)를 강력히 실행하는 조직운영방식의 수평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이 반드시 합의해야 하는 공동결정법(co-determination act, Mitbestimmungsgesetz)의 정신을 발휘하도록 함으로써 상급자의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이 없이도 효율적인 업무처리가 가능하도록 조직구조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이라 하더라도 영미식 모형과 게르만모형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SAP ERP의 인사모듈에는 이런 품의서를 써서 상급자에게 반복적으로 결재를 받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비싼 SAP를 활용하면서도 국내 대기업에는 품의서를 작성하여 상급자에게 올리는 결재시스템을 별도로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죠.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 사설시스템을 없애야 수평적인 네트워크조직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직무설계(job design)를 통해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모든 제도와 관행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다. 독일인들이 패전 후 탈나치화 작업을 통해 나치시대의 모든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나경원이나 황교안과 같은 이른바 토착왜구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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