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 bin Christ"라는 의미에 대하여
2019-02-10_[크리스천(기독교인, Christian)이라는 개념에 대하여(6)]
오늘은 복음서가 저작되는 과정과 그 맥락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믿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을 넘어선 세계와 종교
우선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 성립의 핵심인 ‘성스러움’(das Heilige, the Holy)에 대해 살펴보자. 이것을 다른 말로 ‘신성’(神性, holiness)이라고도 한다. 모든 고등 종교는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보편적 상식이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을 경험할 때, 인간의 두뇌와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경험에 직면한다.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대한 장엄함, 놀라움, 기쁨, 두려움, 직관적 확신 등의 감정을 갖거나 의지를 불태울 때가 있다.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이것을 ‘누멘적 감정’(das numinöse Gefüh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성스러움’ 또는 ‘신성’이 작용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나 할까.
내가 재작년, 그러니까 2017년 여름휴가 때 아이슬란드를 처음 여행했다. 6천 년 전에 폭발했다는 화산과 화산재들로만 덮인 드넓은 곳에 맞닥뜨렸다. 내가 혹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큼 가니까 이번에는 곳곳에서 유황이 섞인 가스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장엄함과 놀라움이 겹치면서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꼈다. 지금은 이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신비로운 경험도 있었다. 독일 유학 중 겪었던 일이다. 1980년대 독일 대학은 예비과정(2~3년)과 본과정(2~4년)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학사학위를 인정받아 본과정으로 편입했다. 입학하기는 수월하지만 졸업하기는 쉽지 않다. 독일 학생들이 졸업하는 기간은 평균 6년 정도 걸렸다. 물론 중도에 탈락하는 비율도 매우 높다. 전공별로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의학, 법학, 경영학·경제학이 가장 높은데 대략 75%의 탈락률이다. 이 탈락률은 어느 대학이나 비슷하기 때문에 탈락하는 것이 유별난 것도 아니다. 독일 학생들은 그냥 덤덤히 받아들인다.
이렇게 대학을 졸업하려면 전공분야의 졸업논문이 통과된 후, 대략 2~3개월에 걸쳐 최종적으로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을 치러야 한다. 당시는 다섯 과목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일반경영학과 일반경제학 두 과목은 필수였고, 나머지 세 과목은 선택이었다. 내가 선택한 과목은 전공분야인 인사조직론, 부전공으로 택한 조직심리학, 먼저 유학 온 중국 친구가 가장 통과하기 쉬운 과목이라고 알려준 생산관리론, 이렇게 다섯 과목으로 선택했다. 과목당 필기 5시간씩, 구두 45분씩 치러야 한다. 독일 학생들도 지옥을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내가 과락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경영학에서 낙방을 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무회계에 관한 이슈들이 출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독일에서 회계사를 할 것도 아닌데 내가 뭐하려 세무회계를 공부하겠는가? 회계학을 포기했더니 그만 세무회계 이슈들이 출제되었던 것이다. 물론 다음 학기에 그 과목만 다시 치러 합격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한 학기가 유예된다는 점이었다. 정해진 기간 내에 박사학위를 마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학위를 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되었다. 당초 세운 내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아니면 박사학위과정을 초스피드로 마쳐야 하는데,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독일 대학의 시험관리처(Prüfungsamt)나 교수들이 내 개인 형편을 알아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것이다. 한국은행이 나에게 허락해 준 기간 내에 모든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야 하는 부담 때문에 좌절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울해 보였고, 공부를 접고 귀국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 자체는 새로운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나의 정신은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 육체는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몸무게가 52kg까지 줄었으니까 지금보다 20kg이나 빠진 상태였다. 경영학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어찌어찌 나왔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아주 좋았던 어머니가 나더러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도록 힘을 써볼 테니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성직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별 생각이 다 나는 법이다. 시험에서 떨어진 것은, 혹시 신학공부를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그런 고민 속에 휩싸여 있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습관처럼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지만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를 감싼 채 꾸부리고 대책 없이 책을 보는데 갑자기 책 위로 나의 과거가 생생한 그림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장면 장면이 지나가면서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얼마 동안 그랬는지 모르겠다. 책 위에 내 눈물이 떨어졌고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 불가사의한 사건 이후 나는 생기를 되찾았고, 경영학은 내 삶에 매우 중요한 학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경험을 아내와 상의했다. 내가 너무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 후, 나의 경영학은 이전보다 훨씬 더 탄력을 받아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2년 반 만에 Diplom-Kaufmann(경영학 석사), 다시 2년 반 만에 Dr.rer.pol(경영학 박사)를 끝낸 것이다. 독일 교수들과 독일 친구들도 모두 놀랐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놀랐다. 유학생들이 박사학위에만 매달려도 5년은커녕 10년씩 걸리는 경우가 허다한 판이었다. 그렇게 장기간 노력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귀국한 이후 한 번 더 신기한 일이 있었다. 군대 간 아들이 부대 내에서 축구하다 부딪혀 오른쪽 눈썹 위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도 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홀로 유학을 떠난 아들이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모습과 함께 아들의 이마 전체가 찢어진 모습이 책 위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장면 장면이 그리 길진 않았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게 웬일이지, 하면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대에 연락할 길도 마땅치 않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번 휴가 때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라면서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사고가 난 때가 내 책 위에 아들의 얼굴이 나타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의식을 잃었다고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큰 사고였다. 지금도 아들의 아마엔 군의관이 꿰매 준 상처 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사전에 아들과 아무런 교감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그런 현상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보편적 이성이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그 후로 나에게 이렇다 할만한 특별한 경험은 없었다. 지난 10년 간 여름휴가를 매년 딸이 사는 런던으로 갔다. 세인트 폴(St. Paul) 대성당에 들어가 여행자의 피곤함을 풀기 위해 의자에 잠시 앉아있을 때. 마침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 음악은 평소와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아내에게 물으니 그냥 성당에서 연주되는 평범한 오르간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뇌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작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매우 주관적이고도 신비로운 체험이다. 이런 현상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미국의 위대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다. 이런 현상이나 감정상태를 신학적 입장에서 정리한 문헌이 앞에서 말한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이다.
복음서 저작의 맥락에 대하여
내가 이런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사도 바울과 복음서의 관계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 시작된 종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인물과 그 사상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독교는 예수에 의해 시작된 종교가 아니다. 예수는 잘못되고 부패한 유대교를 뜯어고치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러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사는 바람에 정치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환상 속에서 십자가 형틀에서 처형된 예수를 만났다. 내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며칠간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바울은 이 회심 사건 이후 몇 년간의 휴지기간을 거치면서 바울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사상을 정립했다. 이 사상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칭의와 재림이라는 위대한 신학이 되었다.
자신이 정립한 신학사상을 베드로와 야고보 등 당시 예수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상의한 후,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격적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예수공동체(교회)들을 개척했고, 이 개척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써 바울이 어떤 생각을 했던 사람인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 그리고 이 사건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나아가 부활한 예수가 곧 재림한다는 독특한 신학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그래서 이 위대한 사상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은 결코 헛되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던 사건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바울의 편지에 드러난 신학사상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 즉 남녀노소의 차이, 빈부의 차이, 신분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토록 하겠다는 이 대담한 프로젝트는 억압과 착취를 당하던 하층민들에게 깊은 감동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더구나 부활한 예수가 곧 재림하여 모든 것을 평천하할 것으로 약속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바울의 카리스마와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마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공동체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바울은 동년배였던 예수가 살아서 활동하던 시기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는데, 예수의 일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생애를 잘 알고 있는 제자 중에서 만들어낸 문서가 바로 마가복음이고, 이 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바울의 신학사상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문서였다. 그 저작 시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예수 사후 30~40년이나 지난 시기, 그러니까 대략 AD 70년 전후로 추정된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유대인 중 열심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처참하게 패배하여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당시 예수공동체를 이끌고 있던 지도자들은 망연자실해 있던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했다. 바울신학에 부합하도록 예수의 생애,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명확히 기술함으로써 예수공동체의 믿음을 더욱 튼튼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전쟁에 패배하여 예루살렘 성전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유대지방의 지배층이었던 사두개인들의 역할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유대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마가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를 직접 심문하고 처형한 장본인은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던 총독 빌라도였는데, 이미 현직에서 사라진 빌라도에게 마치 예수처형의 책임을 경감시켜 주는 것처럼 기술한 것을 보더라도 복음서 저자가 로마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누가복음 15장 참조) 그러면서도 이 복음서 저자는 예수공동체 구성원들을 향해 바울신학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복음이 작성된 후 10~20년이 지나자, 그러니까 AD 80~90년쯤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유대인 중심인 마태공동체와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 중심이었던 누가공동체는 다시 마가복음을 비롯한 몇 개의 문서들을 참조하여 각각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마가복음에서 시작된 복음서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바울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직간접적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Synoptic Gospel)라고 한다.
이제 마가복음이 제작된 이후 한 세대가 흘러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자 상황은 치명적으로 바뀌었다. 부활한 예수가 곧 재림한다는 약속은 아무리 기다려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시각에서 예수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며, 진리이며, 그리스도(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예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인간에게 종교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든 불가지론자에게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종교가 사회적으로 올바른 역할을 하려면 그 종교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맥락을 모른 채 주문(呪文) 외우듯이 외운 들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합리성마저 상실케 한다.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대부분 3박자 축복을 갈구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요한 3서 1장 2절 참조) 이것은 조용기 목사가 창안한 기복신앙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신앙이었던 샤머니즘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영혼이 잘 되었다고 해서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를 간구한다는 것이 요한3서 저자의 소망이었다. 목사들이 성서의 구절을 완전히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다. 설교를 듣다 보면 어이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렇다. 사랑의교회를 보라.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르고도 떡 하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뻥을 치고 있는 것이다. 명성교회는 너무나 더러워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지난 2백 년간 신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 성서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초기 기독교 형성과정의 배경과 맥락에 대해서는 전자현미경은 아니더라도 성능 좋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목사들이 더 이상 교인들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이유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거니와, 여러 다양한 문서들이 만들어진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왜 복음서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게 작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문서는 그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서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기까지의 과정도 이미 다 밝혀졌다. 이젠 속일 수 없다. 이것을 무시하면 오늘날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기독교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말대로, 한편으로는 이성적 합리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선 세계(성스러움, das Heilige)를 상정할 수 있을 때에만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성적 합리성을 포기한 채,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을 좇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한 것은 목사들이 교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나아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제대로 가르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엉터리 목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더욱 한심한 상태에 있다. 우리 사회가 부정부패에 찌든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조직의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추구하는 경영학자일 뿐, 신학자는 물론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가? 첫째, 믿음은 내 삶이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그 사회의 생산성과 창의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기독교, 특히 개신교 때문에 노동생산성과 창의성이 형편없이 저하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인(Ich bin Christ)이라는 의미는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오늘에 되살려 따르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믿음은 그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